설 날 때 만날 친구는 어떤 친구가 좋은가? 돈 많은 친구인가, 힘 있는 친구인가?

옛날에는 그랬을지 모르겠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기도 하겠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더라는 게 나의 체험적 진실.

돈 있는 친구, 그는 왜 돈 많게 되었는지 깨닫게 해줄 만큼 돈이 굳다. 자기 돈 불리게 해 주는 친구 아니면 상대도 잘 안 해 주는 경우가 많다.

힘 있는 친구, 그는 자기를 더 힘 있게 해줄 사람 찾아다니기 바쁘다. 그 힘 가져다 힘없는 사람 도와주는 데 쓰는 법이 어지간히 없다.

그러니 무엇이든 없는 사람은 없는 사람끼리 친구 삼는 게 참 좋다. 살다 보면 돈 많고 힘 있어 생기는 근심 걱정도 보통은 넘는 것을 실감할 때가 많다. 아니 할 말로 누구는 그 많은 돈 다 쓰고 갔나? 짊어지고 갔나? 힘도 그 힘이 꼭지까지 오르면 내려가는 비탈이 가파르기 짝이 없고.

자부심 섞어 말하면, 나는 참 변함도 없는 친구다. 어른 되고 나서도 삼십 년 가까이를 설날 때 한가위 때면 꼭 같은 친구들만 만나고 다니니 말이다. 하기사, 그 친구라는 친구들도 멤버가 어느 한 번도 변할 때가 없었으니 무던하다면 어지간히 무던하다고나 할까.

만나는 곳도 늘 대전 옛날 중구청 자리, 지금은 우리들 공원인가가 되었지만, 그 옆에 상투스 당구장이다. 고등학교 졸업하고야 당구라는 걸 쳐본 나는 워낙 삼각함수를 못하다 보니 지금도 고작 백이나 놓을 처지다. 하지만 두 친구는 경우가 다르다. 감사원 다니는 정 모는 이백오십은 놔야 하는데 늘 이백이고, 무늬만 출판사 대표 최 모는 삼백 오십은 놔야 하는데 꼭 삼백이다. 재작년인가부터 우리 사이에 끼어든 내 동생 방 모도 삼백을 놓으니 ‘사회 당구’ 치고는 실력파들이라고나 할까.

-거기서 보지, 네 시에.

말 안 해도 거기가 어딘지 다 아는 상투스 당구장. 그런데 이게 웬 일. 시간 넉넉히 맞춰 먼저 올라가 있으려고 가보니, 없다. 사라진 것이다. 명절 때만 되면 무슨 당구회 멤버들끼리 늘 모여 행사까지 치른다고, 플래카드 걸어 놓은 것도 나쁘지 않았는데, 송두리째 없다.

돌이켜 생각하니, 지난 몇 년간 손님들이 어지간히 줄어들기는 했었다. 젊은 사람들 가는 당구장도 아니고, 전통적인 녹색 당구대에 당구알도 어지간히 크고 무거웠는데, 세월 따라 이곳도 묻혀버린 것이다.

어떻게 해서 근처 다른 곳에 가기는 갔는데, 영 뒷맛 씁쓸하다. 옛날에 상투스라는 커피숍이 브라암스 다음에 생겼고 그 커피숍 이름 따라 당구장도 상투스였다. 가만 있자. 상투스가 무슨 뜻이던가.

상투스. 라틴어. Sanctus. 미사의 성찬 전례 때, 감사의 노래 다음에 부르는 기쁨의 노래.

그랬나 보다. 그래서 옛날 친구들 만나 어지간히 기쁘게 한 세월 보냈었나 보다.

상투스 당구장 주인님,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