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편의 시 하나의 풍경
세계의 노인들과 황지우 시인

수많은 젊은 여행자들이 오가는 시장 노점에 앉은 노인. 모습은 언뜻 외로워 보이지만 표정이 더없이 편안해 보인다.

‘늙는다는 것’과 ‘사라진다는 것’은 어느 인간에게나 서글프고 두려운 일이다. 그러나 누구도 노화와 죽음을 피해갈 수 없다.

우스개처럼 “불공평한 세상이지만 이 두 가지에서만은 평등이 이뤄지고 있다”고 말하는 염세주의자도 존재한다.

죽지 않고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다는 욕망은 동양과 서양이 다르지 않았고, 남성과 여성의 공통된 바람이었으며, 시대가 바뀌어도 그 지향은 변하지 않았다.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제(秦始皇帝)는 나라 안팎으로 사람들을 보내 불로초(不老草)를 찾게 했다. 이 ‘불가능한 프로젝트’에 젊은 남녀 3천 명이 동원됐다.

그들은 왕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어 멀리 한국까지 헤매 다니며 ‘먹으면 늙지 않는 풀’을 구하려 애썼다. 하지만 그런 약초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음에도 진시황제는 겨우 마흔아홉에 죽었다.

16세기 동유럽 귀족의 딸이었던 엘리자베스 바토리(Elisabeth Bathory) 역시 늙지 않는 삶을 원했다.

40세를 넘어서면서 노화한다는 걸 스스로 느낀 그녀는 끔찍한 방법을 통해 젊음을 찾고자 했다. 10~20대 여성들의 피로 목욕을 한 것.

‘불로불사(不老不死)’라는 자신의 욕망을 위해 시녀는 물론 농부의 딸들까지 유인해 살해한 바토리. 수백 명에 이르는 젊은 여성을 죽인 그녀는 결국 재판을 받았고, 빛이 들지 않는 어두운 종탑에 갇혀 사망한다. 그때 나이 쉰넷.

끔찍한 이야기가 길었다. 황당한 방법을 통해 영원히 살고자 했던 왕과 귀족의 이야기는 여기서 그만.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 황지우

초경(初經)을 막 시작한 딸아이,
이젠 내가 껴안아줄 수도 없고
생이 끔찍해졌다
딸의 일기를 이젠 훔쳐볼 수도 없게 되었다
눈빛만 형형한 아프리카 기민들 사진
‘사랑의 빵을 나눕시다’라는 포스터 밑에
전가족의 성금란을 표시해놓은
아이의 방을 나와 나는
바깥을 거닌다 바깥
누군가 늘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버릇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르겠다
옷걸이에서 떨어지는 옷처럼
그 자리에서 그만 허물어져버리고 싶은 생
뚱뚱한 가죽부대에 담긴 내가
어색해져서 견딜 수 없다
글쎄, 슬픔처럼 상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그러므로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
완전히 늙어서 편안해진 가죽부대를 걸치고
등 뒤로 시끄러운 잡담을 담담하게 들어주면서
먼 눈으로 술잔의 수위만을
아깝게 바라볼 것이다

문제는 그런 아름다운 폐인(廢人)을 내 자신이
견딜 수 있는가 이리라.

▲ ‘편안한 표정’이 보기 좋았던 노인들을 만나다

당연한 말이지만 세상엔 늙음과 죽음을 거부하고 두려워하는 인간만 있는 건 아니다. 적지 않은 이들은 노화와 그에 따른 소멸을 자연스런 세상사 순리로 받아들인다. 젊음과 늙음, 삶과 죽음 앞에 순명하는 사람을 여럿 봤다.

후자의 경우엔 나이를 먹어갈수록 편안하고 넉넉한 표정을 가지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적당한 체념과 포기는 정신 건강은 물론 육체적 건강에도 좋다.

아무리 거부한다고 해도 노화는 피해갈 수 없는 엄연한 현실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인간 모두에게.

태국과 프랑스를 여행했을 때 ‘온화한 얼굴이 아름다워 보이던 노인’을 몇 명 만났다.

북적거리는 시장 노점에서 맥주 한 병을 앞에 놓고 그윽한 눈길로 젊은이들을 바라보던 방콕의 영감님, 카페에서 매력적인 피아노 연주를 들려준 파리의 할아버지, 환한 미소로 처음 만난 낯선 여행자에게 갓 구운 빵을 건네던 할머니들….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기자가 젊은 시절 아껴가며 읽었던 황지우(67)의 시 한 편이 기억 속에서 불거져 나왔다.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라는 작품이다.

세련된 차림으로 파리 시내를 오가는 할머니들.
세련된 차림으로 파리 시내를 오가는 할머니들.

▲ 늙는다는 사실은 시인도 견디기 어렵지만...

앞에서 재롱을 떨던 어린 딸은 어른이 돼가고, 시인인 아버지는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지 못하고 ‘사람들을 피해 바깥을 거닐며’ 늙어간다. 부정할 수도 되돌릴 수도 없는 세월이 눈앞에 들이닥쳤다.

늙음 앞에서라면 현명한 시인도 ‘옷걸이에서 떨어지는 옷처럼/그 자리에서 그만 허물어져버리고 싶다’.

날렵하던 청년 시절의 몸은 어느새 ‘뚱뚱한 가죽부대’에 담긴 몰골로 변해버리고, 그게 ‘어색해져서 견딜 수가 없다’고 노래하는 시인. 하지만 황지우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왜냐? “시인은 전망을 만들어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절망적인 노화를 지켜보면서도 아래와 같은 위로를 스스로에게 전하고 있지 않은가.

더 늙더라도 세상에 항복하거나 일상에 투항하지 않고 ‘먼 눈으로 술잔의 수위만을/아깝게 바라볼 것’이라는 관조(觀照)와 낙관 말이다.

청춘남녀가 깔깔거리며 오가는 여행자의 거리에서 하얀 수염을 바람에 날리며 말없이 앉아 있던 태국 노인과 현란한 손놀림으로 젊은 관광객들에게 슈베르트의 ‘세레나데’를 들려준 프랑스 노인.

황지우 시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들은 이미 ‘견디기 힘든 아름다운 폐인’의 단계를 벗어난 게 아닐까?

늙어가는 자신을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임으로써.

늙음에 대해 그런 태도를 가지고 있다면 그들의 죽음 또한 슬픔과 통곡으로만 오진 않을 듯하다. 진시황제와 엘리자베스 바토리가 이들을 봤어야 했는데….

손자를 안은 할머니. 세월은 아기를 노인으로 만든다. 누구도 그걸 피해갈 수 없다.
손자를 안은 할머니. 세월은 아기를 노인으로 만든다. 누구도 그걸 피해갈 수 없다.

▲ ‘죽음의 향기’는 두렵기만 한 걸까?

젊음을 떠나보낸 후 늙어가고 마침내는 세상에서 사라지는 인간의 일생을 아주 가까이서 지켜본 적이 있다. 바로 아버지.

황제도 귀족도 아니었기에 그는 언감생심 불멸 따윈 원하지도 않았다. 회갑을 넘기면서는 자신이 늙는다는 걸 웃으며 받아들였다. 대부분의 노인들처럼 간과 위가 나빴고, 혈압도 높았지만 그로 인해 주눅 들거나 하지 않았다.

마침내 일흔을 목전에 두고 죽음이 찾아왔을 때도 천명이거니 하며 여유롭게 받아들였다.

자신의 존재가 사라져 식구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에겐 머지않아 잊힐 것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고, 거창한 유언도 남기지 않았다.

어디선가 박하향이 풍겨오는, 야단스럽지 않은 조용한 죽음이었다. 인간이란 자신도 결국엔 늙고 죽는다는 명백한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어른이 된다. 이제 기자도 어른이 돼가는 걸까? 아래는 11년 전 아버지의 상을 치르고 쓴 졸시다.

아버지의 죽음에선 박하 향기가 났다

도둑담배를 피우러 간 병원 계단
실연한 동료를 안아주던 간호사와 눈이 마주쳤다
아버지는 여섯 달째 입원 중
녹슨 목련이 오래도록 나무를 붙들던
그해 봄은 지나치게 길었고

마약성 진통제로 견디는 노인
키가 큰 레지던트의 치마는 벚꽃 빛깔이다
아버지는 여섯 달째 입원 중
모래 섞인 바람이 창을 두드리면
흐린 눈망울이 벚꽃을 찾고

백년 같은 하루가 끝나가는 저물녘
녹두죽을 끓여온 엄마가 운다
아버지는 여섯 달째 입원 중
손을 잡고 무슨 말인가를 하려면
모진 힘으로 뿌리치며 자꾸만 돌아눕고

샤워도 양치질도 잊은 지 오래
행여 숨이 끊겼을까 호흡을 확인한다
아버지는 여섯 달째 입원 중
다른 세상에서 묻혀온 냄새인 듯
머리칼과 목덜미에선 박하향이 났고.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사진제공/구창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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