⑥ 광해군의 ‘잡채’는 동네북?

경북 영양 ‘음식디미방’의 잡채. 10가지 채소와 꿩고기로 만들었다. 원형 잡채는 약 20여종의 채소로 만들었다.
경북 영양 ‘음식디미방’의 잡채. 10가지 채소와 꿩고기로 만들었다. 원형 잡채는 약 20여종의 채소로 만들었다.

그도 미처 몰랐을 것이다. 폭군으로 몰려 제주로 유배 갔던 광해군(1575~1641년 7월1일, 재위 1608~1623년). 설마 “음식을 얻어먹고 벼슬을 팔았다”는 지청구를 들을 줄은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대단할 것도 없는 더덕, 김치, 잡채 등을 얻어먹고 국왕이 벼슬을 팔았다는 오명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반정(反正)’에 성공한 이들 혹은 광해군에게 해를 입었던 이들이 ‘광해군일기’를 기록했다. 그들은 자신의 개인 문집에도 기록을 남겼다. 그 내용들을 모두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다.

“(전략) 계집종이 소리를 지르면서 말하기를, ‘영감이 일찍이 지극히 높은 자리에 있을 때는 온갖 관청이 다달이 올려 바쳤는데, 무엇이 부족하여 염치없는 더러운 자들에게 반찬을 요구하여 심지어 김치판서[沈菜判書], 잡채참판(雜菜參判)이란 말까지 있게 하였소?’ (후략)”

-‘연려실기술 , 인조 조 고사본말’

광해군의 제주도 귀양살이 중 있었던 이야기다. 광해군을 따라서 제주도 유배지로 온 계집종이 광해군을 ‘영감’이라고 부르며 패악질을 부렸다. 내용 중 ‘잡채참판’이라는 단어가 나타난다. 잡채를 얻어먹고 참판 벼슬을 주었다는 뜻이다.

 

‘궁중+잡채’는 완벽한 엉터리다. 있지도 않은 ‘궁중잡채’가 잡채를 망쳤다.
당면(唐麵)이 들어간, 우리가 흔히 보는 잡채를 두고 ‘궁중잡채’로 포장했다면 완전 엉터리다.

‘연려실기술’은 연려실 이긍익(1736~1806년)이 정조대왕 시절 남긴 기록이다. 야사(野史)의 성격이 짙다.‘연려실기술’의 ‘잡채참판’은 상촌 신흠(1566~1628년)의 ‘상촌집’에서 따온 내용이다. ‘상촌집’은 ‘연려실기술’에 비하여 약 200년 앞선다.

상촌 신흠은, 선조가 죽기 전 영창대군의 목숨을 부탁한 일곱 대신 중 한 사람[遺敎七臣, 유교칠신]이다. 계축옥사(1613년) 때 실각했고 영창대군은 결국 광해군에 의해서 목숨을 잃었다. 광해군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 없다. 상촌의 기록이 정확한 지도 불확실하다. 분명한 것은 ‘잡채참판’이라는 표현이 당시 시중에 널리 나돌았다는 사실이다. ‘조선왕조실록’ 광해군 9년(1617년) 4월의 기록도 재미있다. 제목은 “이충이 병에 걸려 이명으로 하여금 구완하도록 하다”이다. 본문은 짧고, 끝부분 사관의 덧글이 꽤 길다.

“이충은 간신(奸臣)인 이량(李樑)의 손자이며 이정빈(李廷賓)의 아들이다. 천성이 흉악하고 험살궂은데다가 조상들의 허물이 있어서 선조(先祖)에서 비록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사판(仕版)에 끼이지 못하였다. (중략) 조석으로 맛진 반찬을 올려 왕이 반드시 그가 올리는 반찬이 도착한 뒤에야 식사를 하기까지 하였다. 이에 사람들이 시를 지어서 그것을 조롱하였는데, 그 시에 ‘잡채 상서의 세력을 당할 수 없다.[雜菜尙書勢莫當]’고 하였다.”

본문의 몇 배에 달하는 ‘덧글’이다. 여기에서는 ‘잡채상서’라고 표현했다. 참판, 상서 모두 당상관이다. 높은 벼슬이다. 이 무렵에는 사삼각노(沙蔘閣老), 김치정승, 잡채상서, 국수감사 등의 표현이 등장한다. 모두 보기 드물게 ‘음식+벼슬’이다. 각각 해당하는 사람의 이름, 관직이 정확하게 남아 있다. 사삼은 더덕이다. 사삼각노는 광해군 때 판중추부사를 지낸 한효순(1543~1621년)이다. 잡채상서는 우찬성 이충, 국수감사는 함경도 감사 최관(1563 ~ ?)이다. 역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사관이 토를 단 내용이다. ‘최관의 국수’다.

“(전략) 최관은 광해의 총애하던 신하이다. 최관이 별미로 폐군(廢君)에게 아첨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이충(李冲)의 잡채(雜菜), 최관의 국수라고 말을 하면서 비난하였다.”

이 기록은 인조 2년(1624년) 4월의 것이다. 최관은 광해군 시대를 거쳐 인조 때도 벼슬을 했다. 이 글에도 ‘이충의 잡채’가 나타난다. 광해군의 ‘잡채 뇌물 수수’는 마치 동네북 같이 여기저기 나타난다. 도대체 잡채는 어떤 음식이었을까?

 

‘음식디미방’의 잡채를 비빈 모습. 여기에 밥과 간장을 더하고 비비면 비빔밥이 된다.
‘음식디미방’의 잡채를 비빈 모습. 여기에 밥과 간장을 더하고 비비면 비빔밥이 된다.

◇ 궁중잡채는 허구적 코미디다

‘궁중잡채(宮中雜菜)’라는 표현이 있다. 길거리 음식점 혹은 고급 한식집에서도 버젓이 ‘궁중잡채’를 판다. ‘궁중+잡채’는 완벽한 엉터리다. 있지도 않은 ‘궁중잡채’가 잡채를 망쳤다.

당면(唐麵)이 들어간, 우리가 흔히 보는 잡채를 두고 ‘궁중잡채’로 포장했다면 완전 엉터리다. 당면은 1919~1920년 언저리에 국내에 처음 소개되었다. 당면, 당면 잡채의 시작이다. 나라는 공식적으로 1910년에 망했다. 10년이 지난 다음 한반도에 당면이 등장한다. 당면은 녹말, 전분으로 만든 국수다. 중국인들이 한반도에 소개했다. 황해도 사리원 등에 당면 공장이 생기기 시작한다. 황해도와 평안도 일대는 북관(北關)이다. 중국 문물이 들어오는 루트였다. 조선 말기, 일제강점기에도 여전히 북관은 중국 문물을 들여오는 길목 노릇을 했다. 이 길로 당면이 들어왔다.

1910년대, 당면은 신문물이었다. 동아일보 1935년 2월의 기사에는 “한반도 당면 생산량이 60만근인데 대부분 일본 도쿄, 오사카 등으로 수출한다. 우리 당면이 중국산 보다 질이 좋다”는 내용이 있다. 해방 후에도 “서울풍국제면소의 당면이 대용식량으로 공급된다”는 내용도 있다(1946년 3월18일, 동아일보). 가히 당면 전성시대다. ‘唐麵(당면)’은 당나라 면 즉, 중국인들이 전해 준 면이다. 나라가 1910년에 망했는데 궁중에서 먹었던 당면 잡채라니, 터무니없는 표현이다.

녹말로 만든 국수는 그 이전에도 있었다. 국수를 만드는 가장 흔한 재료는 메밀이었다. 메밀은 점도가 약해서 국수 만들기 어렵다. 메밀가루에 밀가루 혹은 전분 등을 섞는다. 아예 전분으로 만드는 국수도 있었다.

당면의 등장은 전분을 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하면서 가능해졌다. 대량 생산된 전분이 있으니 국수로 만들었다. 당면이 잡채에 들어간다. 잡채의 주인인 채소를 밀어내고 주인 노릇을 한다. 엉뚱한 ‘궁중잡채’ ‘당면잡채’, 우리가 지금 만나는 잡채는 대량 생산 전분 때문에 가능했다. 원형 잡채와는 거리가 멀다. 적반하장(賊反荷杖), 도둑이 오히려 몽둥이 드는 격이다.

◇ ‘음식디미방’의 잡채는 아름다웠다

‘음식디미방’의 잡채는 ‘채소 모둠 쟁반’이다. ‘잡채(雜菜)’는 표현 그대로 ‘여러 가지 채소 모둠’이라는 뜻이다. 당면은 어디에도 없다. ‘음식디미방’의 잡채는 10여 종류의 채소와 꿩고기를 한 쟁반에 내놓는 음식이다. 여러 가지 채소를 모은 것이 잡채인데 지금 만나는 잡채는 엉뚱하게도 단맛이 강한 ‘양념 당면’이 주인이다. 비틀어진 음식이다. 산나물, 들나물의 향기가 아니라 짝퉁 간장과 조미료, 감미료 범벅의 비틀어진 맛을 취한다. ‘음식디미방’에 나오는 잡채 만드는 방법 중 일부다.

오이채, 무, 댓무, 참버섯, 석이, 표고, 송이버섯, 숙주나물 등은 생으로, 도라지, 거여목, 박고지, 냉이, 미나리, 파, 두릅, 고사리, 승검초, 동아, 가지와 꿩고기는 삶아서 찢는다.

 

연근, 도라지, 시금치, 고사리 등 나물이 주인인 음식. 원형 잡채와 가깝다.
연근, 도라지, 시금치, 고사리 등 나물이 주인인 음식. 원형 잡채와 가깝다.

꿩고기를 제외하고 모두 채소 종류다. 한 쟁반에 채소 종류만 무려 19가지다. 여기에 채소를 붉게 물들인 맨드라미와 양념으로 쓴 생강, 천초(산초), 후추, 참기름 등등을 합하면 족히 20여 종의 나물, 채소, 식물의 씨앗 등이 들어간다. 가히 ‘여러 가지 채소 모둠 쟁반’ ‘잡채’라 부를 만하다. 짝퉁 잡채가 유행하면서 ‘음식디미방’의 아름다운 잡채는 사라졌다.

한식의 특질은 끊임없는 변화와 발전 그리고 다양함이다. 잡채에 당면이 들어간 것도 긍정적인 변화와 발전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그렇지는 않다.

잡채는 한반도의 아름다운 ‘나물’ 문화가 바탕이다. ‘음식디미방’보다 270년 쯤 전인 조선 초기의 기록이다.

고운 봄빛 광주리에 가득 차 있고/모락모락 아지랑이 아른거리네

지난밤 장단(長湍)에 비 내렸는지/멀리서도 녹음 덮인 그대 집을 알겠구나

-송당집 제1권 ‘장단 유 선생이 시와 산채를 보내와 운을 빌려 감사하다’의 일부

아름다운 이른 봄날이다. 시의 제목에 나타나는 ‘장단 유선생(長湍 兪先生)’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시를 남긴 이는 조선의 개국공신인 송당 조준(1346~1405년)이다. ‘장단 유 선생’이 조준에게 산나물과 시를 선물로 보냈다. 여말선초의 문신이었던 조준은 정도전과 더불어 조선의 경제 틀을 짠 고위직 경제 관료였다. 벼슬도 좌정승(左政丞)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로 높았다. 아지랑이 아른거리는 봄날에 당대의 실세 관료에게 시와 산나물을 선물로 보냈다.

조선시대 반가에서는 오신반(五辛盤), 오신채(五辛菜) 선물이 유행했다. 이른 봄 겨울을 헤치고 나온 햇나물을 옆집과 나눠 먹는 풍속이다. 오신채는 ‘매운 맛의 다섯 가지 나물’이다. 움파, 산갓, 당귀싹, 미나리싹, 무싹 등이다. ‘다섯 가지 잡채’다. 향이 강하고 맵다고 오훈채(五葷菜) 혹은 오신반(五辛盤)이라 불렀다.

 

17세기에도 녹말(전분)로 만든 국수는 있었다. 오미자 국물에 말아낸 전분국수.
17세기에도 녹말(전분)로 만든 국수는 있었다. 오미자 국물에 말아낸 전분국수.

아래는 ‘음식디미방’보다 약 350년 뒤인 2018년 5월의 경북매일 기사다.

관광객 ‘오감만족’ 평가

영양군의 대표 축제인 ‘영양산나물축제’에 10만 관광객이 찾아 ‘대박’을 터뜨렸다.(중략) 영양군과 영양축제관광재단은 ‘봄의 기운을 쌈싸 먹어’의 주제로 열린 ‘제14회 영양산나물축제’ 기간 동안(중략) 지역행사를 연계해 산나물을 중심으로 먹거리장터를 만들어 방문한 관광객의 체류시간을 평균 5시간 이상 늘려 영양군의 매력을 듬뿍 안겨주었다.(후략)

-영양/장유수 기자

1400년 무렵 ‘송당 조준의 나물 선물’ 1670년 무렵 ‘음식디미방’의 잡채, 2018년 5월 경북 영양의 ‘산나물축제’는 모두 ‘여러 가지 나물’로 연결되어 있다. ‘여러 가지 산나물, 들나물 모둠 잡채’다. 산나물, 들나물, 잡채는 반가에서 귀히 여겼다.

우리는 향기로운 여러 가지 나물, 잡채가 빠진, 들척지근한 당면이 주인 노릇을 하는 ‘궁중잡채’의 시대를 살고 있다.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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