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섭변호사
박준섭
변호사

제일모직은 삼성의 고 이병철 회장이 대구 침산동에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모직공장이다. 지금은 이곳에 창조경제혁신센터가 들어서 있다. 여기는 작지만 컨벤션센터도 있고 혁신가를 키우는 강의실과 사업장도 있다. 야외에는 공연장과 꽤 근사한 식당과 카페도 있다. 창조경제 혁신센터의 한 부분에는 오래된 건물이 리모델링돼 사용되고 있다. 이곳은 바로 제일모직 기숙사로 사용되던 곳이다.

여직원의 기숙사는 이병철 회장이 제일모직 공장을 지으면서 특별히 관심을 둔 곳이다. 그는 1천명이 넘는 여직원을 위해 모든 기숙사에 스팀난방을 하고 목욕실, 세탁실, 다리미실, 휴게실도 만들도록 했다. 복도에는 오래된 소나무인 회나무를 깔았다. 좋은 나무를 사다 심는데 돈을 아끼지 않았고 연못과 분수도 만들었다. 공장 전체를 마치 잘 다듬어진 정원으로 만들고자 했다고 한다. 훗날에는 여직원의 가족이 면회오면 기념촬영을 하도록 전속 사진사까지 따로 두었다고 한다.

이병철 회장이 제일모직의 기숙사를 만들면서 이처럼 심혈을 기울인 이유는 와세다 대학시절에 읽었던 ‘여공애사’라는 책 때문이다.‘여공애사’는 말 그대로 여공의 슬픈 생활을 그린 것이다. 호소이 와키조가 쓴 이 책은 1925년 출간되자마자 일본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당시 일본의 공장에서 일하던 여공은 기본적으로 하루에 12시간 노동을 하고 그것도 모자라 잔업도 했다. 작업장의 환경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열악해서 공장 안은 옷감을 다리는 스팀으로 숨이 턱턱 막혔고, 온종일 서서 일했다. 작업도중에는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한 사람에게 마련된 기숙사의 공간은 다다미 한 장 크기였다고 한다. 그녀들의 식사는 밥에 된장국과 채소반찬이 전부였고 점심은 비료로 쓰던 정어리와 청어였다. 그들은 가혹한 노동과 영양부족으로 병에 걸려 죽거나 대부분 폐병에 걸렸다. 도망가던 여직원은 다시 잡혀왔고 일부는 투신자살했다.

우리의 젊은 세대는 우리 근대화 과정에서 자본을 축적하면서 정경유착, 관치금융, 노동착취 등을 통해 대기업이 왜곡된 부를 형성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서구는 은과 노예의 삼각무역, 제국주의를 통한 식민지지배, 전쟁을 통해 자본을 축적했고 오늘날의 선진국이 됐다. 우리를 식민지배했던 일본도 더 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제일모직 기숙사는 우리나라 대기업이 어떤 마음으로 직공들을 대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곳이다. 포스텍의 이진우 교수는 우리의 대기업은 우리의 근대화 과정에서 볼 때 국민의 맏아들과 같은 의미라고 했다. 우리의 윗세대는 맏아들이 잘되면 온 가족이 잘될 것으로 생각했고 맏아들을 우선 교육시키고 지원했던 시절을 살았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의 대기업도 정부가 지불보증을 서고 온 국민이 적극적으로 희생하며 집중 지원한 맏아들이었다. 그것은 맏아들이 잘되면 국민이 잘되게 하겠다는 사회적 약속이었다. 대기업이 맏아들 역할을 하고 빚을 갚아야 할 시기가 왔는데 IMF사태가 터졌다. 대기업의 재산은 세계로 팔려나갔고 주식은 세계의 자본이 나눠 가졌다. 맏아들인 대기업은 맏아들 역할도 하지 못한 채 세계화의 경쟁 속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지금 우리의 대기업은 모순과 혼돈 속에 있지만, 아직도 여전히 우리의 맏아들이다.

지금 현대자동차가 수소자동차를 혁신의 주력으로 삼겠다고 한다. 여러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겠지만 국가와 국민은 우리나라 전체가 수소자동차의 테스트베드가 되도록 정책적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세계 시장을 선도할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이에 상응해 현대자동차의 오너와 노동조합은 기업이 독립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의 역사와 국민과 세계에 동시에 걸쳐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사회적 약속을 해야 한다. 그것은 최고의 혁신기업이 돼 모든 열정과 지혜를 다해 맏아들의 역할을 확실히 하겠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