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두우 ‘포항의 3․1운동사’ 보완판 발행인 인터뷰
당시 판결문 원본 입수․유족 면담 등으로 사실 확인

이두우 '포항의 3.1운동사 보완판' 발행인
이두우 '포항의 3.1운동사 보완판' 발행인

포항문화원이 3․1운동 100주년을 앞둔 최근 ‘포항의 3·1운동사’ 보완판을 내 지역사회에 높은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포항의 3·1운동사’ 보완판은 포항 송라면 대전리 3·1운동 기념관과 정부기록보존소(현 국가기록원),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등을 찾아 당시의 기록을 조사하고 유족들을 만나 면담한 내용을 실었다.
또 국가기록원에 보관된 포항면 3·1운동 관련 판결문 원본을 입수해 정확하게 번역함으로써 그동안 앞뒤가 연결되지 않았던 당시의 상황들을 바르게 정리했다. 일본 외무성 보고 자료도 찾아 보완했다.
포항의 3·1운동사’ 보완판 발행인 이두우 전 포항시의원(포항제일교회 장로·당시 포항교회)을 만나 포항·영일지역 3·1운동을 집중 조명한다.

△포항 3․1운동, 경북 3․1운동의 효시
-포항 3·1운동은 경북 3·1운동의 효시로 불린다. 포항지역 3·1운동이 일어난 배경은?
►1919년 3월 8일 오후 3시 대구 서문시장에서 대구 3·1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영남지역 최초였다.
이 운동에 영일군 포항면의 최경성(36) 포항교회(현 포항제일교회) 장로, 송문수(37) 포항교회 장로 등이 참여했다.
최경성 장로는 현장에서 일제 군경에 체포, 구속됐고 송문수 장로는 포항으로 피신했다.
송문수 장로는 포항교회가 설립한 영흥학교 교사인 장운환 교인 등에게 대구 3·1운동을 들려줬다. 이들은 11일 포항장날인 여천시장에서 포항 3·1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최경성 장로와 송문수 장로가 대구 3·1운동에 참여하게 된 동기는?
►미국 북장로교회 소속 안의와 선교사가 일찍이 대구에 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를 설립한데 이어 1905년 포항에 포항교회를 개척했다. 대구남성정교회와 포항교회는 형제교회였다. 대구 3·1운동을 주도한 이만집은 남성정교회 목사였다.
이만집 목사가 포항교회 최경성 장로와 송문수 장로 등을 설득해 대구 3·1운동 참여를 이끌어 냈다. 이만집은 독립선언 서명자 33명명 중의 한 사람인 이갑성(기독교인)의 권유로 대구 3·1운동을 기획하고 실행했다.
포항 3·1운동과 대구 3·1운동은 기독교인들에 의해 주도됐다.

-기독교인들이 주도했다는 근거는 뭔가?
►대구 3·1운동의 모의가 노회 임원들을 중심으로 이뤄졌고, 교역자들을 비롯한 교계의 지도자들이 앞장서 운동을 주도했다. 미국 기독교 북장로파 부속 계성학교 교사들과 장로파 부속 신명여학교 교사들은 학생대표들을 만나 학생들의 참여를 이끌어 냈다. 체포된 76명의 주동인물 중 53명이 기독교인이었다. 포항 3·1운동도 마찬가지다. ‘포항제일교회 100년사’와 유족들의 증언에 따르면 포항교회 교인들과 포항교회가 설립한 영흥학교 교사들이 주도했다.

△포항장날 여천시장서 첫 함성
-3·1운동 직후인 1920년 임시호구조사 결과를 보면 영일군 포항면의 인구는 1천436가구 6천588명이었다. 이중 일본인이 381가구 1천604명으로 전체 인구의 24.35%를 차지했다. 거사를 계획하고 추진했다면 사전에 발각될 가능성이 많았을 텐데…
►거사가 탄로나 송문수 장로와 이기춘(영흥학교 교사), 이봉학, 장운환 등 4명이 체포됐다. 이 소문이 시내로 전파됐다. 포항장날인 11일 수백 명의 군중들이 여천장터에 운집했다. 주동자들은 검거됐지만 군중들은 만세를 부르며 시가행진을 했다.
일본 군경의 저지로 강제해산 됐으나 다음날 저녁 포항교회 신도들을 중심으로 교회에 모여 등불을 들고 만세를 부르며 시위행진을 이어갔다. 시내 수 km를 행진하던 동안 시민들의 참여가 늘어 군중의 수는 1천여 명으로 불어났다.
이 운동은 22일 청하면과 송라면, 27일 송라면 대전리 두곡 숲, 4월 1일 연일과 동해, 당기, 오천, 대송, 달전, 2일 기계, 죽장, 신광, 청하, 송라, 흥해, 5월 7일 청도군 매전면 구촌리에 이르기까지 경북 곳곳으로 들불처럼 확산됐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당시 영일군와 포항면의 행정구역에 대해 설명해 달라.
►당시 영일군은 흥해면, 곡강면, 달전면, 연일면, 오천면, 동해면, 대송면, 포항면, 장기면, 봉산면, 창주면, 청하면, 송라면, 죽남면, 죽북면, 기계면, 신광면 등 17개면과 225동리를 관할했다.
포항면은 1931년 포항읍으로 승격됐고, 1949년 포항시로 승격됐다. 포항시는 1995년 영일군과 통합, 도농통합 포항시가 됐다.

△3․1운동 뒤 일제 핍박 이어져도 교인들 동요 안 해
-포항 3·1운동을 주도한 교인과 교회에 대한 일제 군경의 핍박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 달라.
►포항교회 교인들과 영흥학교 교사들이 3·1운동 뒤 일제로부터 지속적인 피해를 입었다. 영흥학교 교사였던 장운환과 사환이었던 이기춘은 형기 종료 후 일제의 등살에 못 이겨 만주로 망명했다.
포항교회는 많은 교인들이 체포되어 실형을 선고 받는 등 시달림을 받고 피해도 입었지만, 교인들은 동요하지 않았다. 교회는 이 어려움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았다.
교회는 상처 받은 교인들의 영성회복을 위해 부흥회를 개최했고, 사회 회복에도 앞장섰다. 교인들이 예배당 건축을 위해 거금 900원을 헌금했다.
평양숭실전도대가 이 지역의 교인들을 위해 격려차 방문하기도 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도들의 수가 크게 증가했다.

-포항에서는 포항교회 교인들과 영흥학교 교사들이 주도했던 여천장터 만세운동과 청하·송라면 주민들의 주동이 된 청하장터 만세운동이 대표적이다. 청하장터 만세운동의 발단은?
►청하·송라 3·1운동은 1913년 이익호가 설립한 대전교회에서 태동됐다.
이익호가 송라면장에 부임한 뒤 송라면 대전리에 대전교회, 청하 읍내에 청하교회, 청하 유계리에 유계교회를 설립했다. 기독교 중심으로 계몽운동을 펼쳐나갔다. 3·1운동을 4개월 앞둔 1918년 11월 6일 45세 나이로 병사했다.
그의 아들 이준석, 이준업이 대전교회 옆 초가삼간 자택을 중심으로 3·1운동을 펼쳐나갔다.
청하·송라면의 3·1운동은 송라면 대전리 출신 14명과 청하면 출신 9명이 주도했다.

-청하·송라면의 3·1운동 일부 주동자도 사전에 발각돼 검거됐다고 하던데…
►이익호의 아들이자 대전교회 교인인 이준석과 이준업이 같은 교회 영수인 윤영복과 청하장터에서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약속했다.
윤영복은 청하교회 영수인 오용간과 같은 교회 교사인 윤영만을 찾아 22일 청하면 덕성리에서 열리는 장날 거사하기로 했다.
윤영만이 거사 당일 덕성리 시장(청하장)으로 가다 일경에 검거됐으나 윤영복 등은 이날 오후 1시 30분 덕성리 시장에서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들이 부르는 함성은 시장을 진동시켰다. 주동자 23명은 그날 일경에 검거됐다.
송라면 대전리 마을주민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27일 대전리 두곡 숲에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더 세차게 불렀다.

△송라 대전리 마을 ‘3․1만세촌’으로 명명
-송라면 대전리 마을이 ‘3․1만세촌’으로 불린 이유는?
►대전리의 만세운동은 후세에도 이어졌다. 3․1운동 이후 대전리 어린이들은 골목골목에서 어른들이 행하던 만세모습을 흉내 내는 만세놀이를 계속했다.
이에 일본 경찰이 수시로 마을에 들어와 아이들의 행동을 저지하며 핍박했다. 이로 인해 80여 가구가 50여 가구로 줄어들었다.
지역 주민들은 이 마을을 ‘3․1만세동’이라고 명명했고, 영일군 향지회는 1986년 5월 송라면 대전리 ‘3․1의거 기념비’에 이 마을을 ‘3․1만세촌’이라고 적었다.
마을 전체가 80여 가구인 한 마을에서 14인의 3․1의사가 난 곳은 전국에서도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보면 청하의 만세시위는 2회, 참가인원 500명, 부상자 50명, 피검자(범죄혐의가 있어 수사기관에 일시적으로 잡혀 있는 사람) 40명으로 기록돼 있다.

△3․1운동, 경북전역으로 들불처럼 확산
-포항면과 청하․송라면에서 일어난 3․1운동이 인근지역으로 옮겨 갔다고 하던데…
►3․1운동은 4월 1일 연일․지행(현 장기)․오천․대송․달전 등으로 확산됐다. 그날 밤 동해면에서는 수백 명이 횃불을 들고 만세를 부르며 시위했다. 이튿날인 2일에는 기계면 뒷산에 봉화가 오르더니 인근 죽장면에서부터 만세운동이 일어나 신광 등 각 면에서 일제히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했다.

△영일지역 사망자 40명․부상자 380명 집계
-영일군 3․1운동 사망자와 부상자는 얼마나 됐나?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9회 시위에 2천900명 참가, 40명 사망, 380명 부상, 320명 피검자로 나타났다. 전국적으로 봐도 결코 적은 규모라 할 수 없다.

-3·1운동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이 뭔가?
►대한제국 고종이 독살됐다는 독살설이 소문으로 퍼졌기 때문이다.

-3·1운동으로 인한 희생자들이 적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는데…
►조선총독부가 집계한 공식기록에 따르면 3·1운동에 참여한 집회인수는 106만여 명이고, 그중 사망자가 7천509명, 구속자가 4만7천명이었다. 당시 조선 인구는 1천678만8천400명이었다.

△일제 충격… 무단통치서 문화통치로 전환
-이 운동은 일제에 큰 충격을 줬다고 한다.
►그렇다. 일제 조선총독부는 그동안 군사·경찰에 의한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정책을 변경했다.
이 운동은 해외 언론에서도 큰 반응을 보였다. 중국의 5·4운동과 인도의 반영운동, 베트남, 필리핀, 이집트의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3․1운동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여 전 민족이 일어난 항일독립운동으로 일제 강점기에 나타난 최개 규모의 민족운동이었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직업과 신분의 구별 없이 줄지어 일어났다.

△기독교, ‘민족종교’로 자리매김
-마지막으로 교회가 독립운동의 중심에 선 이유는 무엇이라 보는가?
►당시 나라 안에서 독립의지를 가진 사람들이 뭉칠만한 조직체로 교회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교회는 본질상 실망과 불안에 처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소망을 주며 마음의 평화와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곳이라는 점을 벗어날 수 없었다. 어려움에 처한 민중들이 자연스럽게 교회를 의지하게 되고 또한 교회는 정치운동에 참여하는 단체가 아니면서도 고난에 처한 이들에게 위로와 소망의 터전을 제공하게 됐다.
기독교는 3․1운동 참여로 ‘민족의 종교’로 자리를 매길 수 있었다.

-장시간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김규동기자 kdkim@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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