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3·1만세운동 100주년을 기대하며(中)

일제강점기인 1910년 수도산(모갈산)에서 내려다본 포항면.
일제강점기인 1910년 수도산(모갈산)에서 내려다본 포항면.

아무튼 주동자들 중 4명은 사전에 검거됐다. 하지만 포항장날인 11일 수백 명의 군중이 장터로 운집하였다. 이들은 만세를 부르고 독립선언서를 벽에 붙이며 시위행진에 돌입했다. 이날은 일본 군경의 저지로 강제해산 됐다. 하지만 12일 저녁에는 포항교회의 신도들이 중심이 되어 흩어졌던 군중들이 다시 모였다. 이날 밤, 북본동(北本洞, 현재의 중앙동) 포항교회에 모여든 신도들 수백 명은 일단 교회에 모였다가 등불을 들고 시내로 나와 만세를 부른 후 교회에서 경영하던 영흥학교 서편에 다시 모였다. 당시 포항교회는 현재의 포항시 중앙동 451번지에 있었고, 영흥학교는 포항교회 부지 안에 있었다. 교회에서 발기하여 시내를 수㎞ 행진하는 동안 이를 지켜본 시민들도 동참하여 대열이 영흥학교에 다시 모였을 때는 군중의 숫자가 1천여 명이 됐다고 한다.
 

영일청년회 이끈 청년 멤버들
또 다른 3·1운동 주력 세력으로
포항 지명의 뿌리는 ‘포항창진’
포항교회·영흥학교·포항장터 등
포항 3·1운동이 태동한 유적지

 

남빈사거리에 있었던 승개교(1920년). 뒤에 보이는 현대식 건물이 3·1운동 당시에 있었던 포항교회의 모습이다.
남빈사거리에 있었던 승개교(1920년). 뒤에 보이는 현대식 건물이 3·1운동 당시에 있었던 포항교회의 모습이다.

이런 규모의 군중이 일시에 모인 것으로 보아 포항의 3·1운동은 송문수 등 5명 외에도 또 다른 지도세력이 있지 않았을까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단시일 내에 1천여 명의 군중을 모을 수는 없다. 이를 입증해주는 자료가 있다. 바로 위의 송문수 등 판결문과 3·1운동 이후에 설립된 영일청년회를 창립한 구성원들 명단이다.

우선 송문수 등의 판결문 중 ‘이기춘과 이봉학은 송문수를 만난 다음날인 10일부터 포항에서 김동은(金東殷) 외 수명에게 송문수로부터 들은 바를 전하고 함께 동참할 사람들을 모집하였다’고 했다. 김동은은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 6월에 창립된 영일청년회에 창립멤버의 간부로 참가했다. 영일청년회는 창립 당시부터 포항 3·1운동의 주역 중 한 사람인 이기춘이 운동부장으로 참여했고, 그 다음해 임원개선 때는 김동은이 체육부장을 맡았다. 당시 청년회를 주도한 사람들은 이일우, 최석규, 이기춘, 김병수, 김동은, 정대여, 정종만, 오치우, 김찬조, 박용수, 김철호 등이다. 이 단체는 김동은 이기춘 외에도 포항 3·1운동에 직접 참여한 최경성, 이상갑, 정학선 등이 깊이 관여돼있었다. 영일청년회를 이끈 청년멤버들이 또 다른 포항 3·1운동의 주력 세력이었음이 밝혀지고 있는 것이다. 초대임원 중 덕육부장을 역임한 김복출은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대구 남산정교회에서 전도활동을 했다. 이후 포항교회로 파송되어 전도를 했고, 포항교회 목사로 부임했다. 운동부장 이기춘은 동아일보 영일지국과 포항분국에서 기자로서 활동했다.

포항 3·1운동이 첫 시작된 옛 포항교회. 그 흔적조차 찾을길 없다. 현재는 포항소망교회가 들어서 있다.  반면 6·25때 폭파되지 않았다는 사진은 교회 입구에 전시되어있다.  /이용선기자
포항 3·1운동이 첫 시작된 옛 포항교회. 현재는 포항소망교회가 들어서 있다. 반면 6·25때 폭파되지 않았다는 사진은 교회 입구에 전시되어있다. /이용선기자

이와 같이 포항면의 3·1운동은 포항교회와 사립 영흥학교 교사들, 그리고 김동은, 이상갑 등 청년들의 주도하에 3월 11일과 12일 양일간에 걸쳐 이루어졌던 것이다.

포항교회와 사립 영흥학교는 포항면 3·1운동 진원지로서 포항 3·1운동사에 큰 족적을 남기게 되었지만, 3·1운동 후 일제로부터 지속적인 피해를 입었다. 영흥학교 교사였던 장운환과 이기춘은 형기 종료 후 일제의 등쌀에 못 이겨 만주로 망명하였다. 이들의 행방은 지금까지도 알 수 없게 되었다.

송문수도 한때 이봉학과 같이 만주로 가 만주 봉천성 일대에 피해 있다가 귀국한 후로는 흥해청년회 창립에 관여하는 등 활동을 계속하였다. 이봉학은 출옥 후 대구시 태평로 1가 5의3번지로 이주하였다가 다시 포항동으로 돌아와 살다가 1974년 4월 10일 사망하였다.

포항 3•1운동을 이끈 송문수 등의 판결문. 출처‘포항의 독립운동사’ 

최경성은 옥고를 치른 후 포항으로 돌아와 1927년 7월 22일 신간회 영일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1931년 사립영흥학교의 존폐문제가 대두되자 교장으로서 면민들의 적극적인 성원을 호소하고, 1944년 3월 포항유치원을 창설하여 원장에 취임하였다. 1950년 4월, 3·1동지회 부회장, 1955년 5월에는 회장으로 선출되는 등 오로지 나라와 향토를 위한 교육,독립,사회운동에 앞장서서 활동했다. 잡화상으로 재산을 모아 사립영흥학교와 1930년 전후 포항교회 건물을 세울 때 많은 기부를 하였고, 말년에는 전 재산을 교회에 헌납한 후 교회 사감 사택에서 지내며 교회의 온갖 일을 맡아 하다가 대구의 양아들 집으로 옮겨가고는 소식이 끊어졌다.

송문수는 옥고를 치른 후 1920년 10월 10일 흥해중앙교회로 이적(移積)하였고, 1921년 2월 흥해 신명학교 교감으로 선출되었다. 학교 운영경비를 투자하며 학교를 유지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봉학은 옥고를 치른 후 행적에 대해 알려진 바가 없다.

그 외에도 포항 3·1운동에 참여하였다고 알려진 사람들로는 이상갑과 정학선 등이 있다. 이상갑은 영일군 포항읍 출신으로 일찍이 3·1운동에 가담하였다가 일본경찰에 검거된 전력이 있는 사람이다. 1925년 8월에 영일청년회, 그해 10월에 영일청년연맹에서 활동하다가 이 무렵에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포항 야체이카에 배속되었다. 경북 영일 출신으로 1920년 6월경부터 영일청년회에서 활동하던 정학선(1896~?)은 1924년 일본 도쿄에서 최원택의 권유로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하였다. 그는 1925년 10월경 포항에서 이상갑, 이재우 등과 함께 고려공산청년회 포항 야체이카를 결성한 이후 사회주의 운동으로 노선을 바꾼 사람이다.

◇포항의 3·1운동 유적지

행정동인 포항 중앙동은 중앙동·신흥동·남빈동·상원동·여천동·대흥동·덕수동·덕산동·동빈동 등의 법정동으로 이뤄져 있다. 글자 그대로 포항시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을 뿐 아니라 포항역사의 근원이다. ‘포항’이란 지명도 1731년 이곳 대흥동에 세곡(稅穀)을 수송·보관하는 포항창진(浦項倉鎭)이 설치됨으로 인해 생겨났다.

이상준 향토사학자
이상준 향토사학자

포항 중앙동 일대에는 포항 3·1만세운동의 근원지인 포항교회(현 포항제일교회의 구건물·포항소망교회)터와 그 교회에서 설립한 영흥학교 터, 만세시위를 벌인 포항장터, 일본인의 집단주거지 및 상업용 시설 등 3·1운동 유적지가 있다.

1934년경 포항교회를 새로 지을 무렵이었다. 그 장소에 있던 기존건물을 철거하기 위해 예배당 마루를 뜯어내자 마루 밑에서 1919년 3·1운동 당시 사용됐다고 추정되는 다량의 태극기와 악기 등이 나왔고 한다. 하지만 당시는 일제강점기 순사들의 서슬이 퍼런 시절이라 드러내지 못하고 없애버렸다고 한다.

1919년 3월 11일 3·1운동의 시위 장소였던 포항장터는 대흥동에 있었다. 현재로 치면 그 위치는 중앙상가 부근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조선시대 칠성강 북서쪽 대흥산 앞에 마을이 형성되어 대흥리로 부르다가 포항창진이 설치되면서 부락명이 포항리로 되었다. 이 동네에 매월 1일과 6일에 포항장이 형성되었다.

3·1운동의 유적지로 일본인들의 가옥과 건물들도 빼 놓을 수 없다. 일본인들이 주인 행세하며 거주하던 시내 한복판에서 포항사람들이 간 크게도 나보란 듯이 만세시위를 벌인 것이다.

1901년 가을에 거래 차 포항에 오게 된 일본인 나카다니 다케사부로(中谷竹三郞)의 회고담에 의하면 그가 이주할 당시 포항 일대(대흥동을 중심으로 한 시내지역)의 한국인 호수는 120~130호 정도였다고 한다. 이후 1903년 일본 돗토리현(鳥取縣)의 오쿠다구(奧田龜) 삼형제가 처음으로 지예망(地曳網)을 가지고 출어한 이후 1904년 일본과의 통어(通漁)조약이 체결되면서부터 일본어민의 통어 및 이주자가 증가했다. 1905년 초에는 곡물, 해산물 무역을 하는 오카모토 리하치(岡本利八)·이와사 히로이치(岩佐廣一)·오카모토 시로스케(岡本四郞助)를 비롯한 6∼7명의 일본인들이 선두주자로 포항에 왔으며 그 해 말에는 일본인 약 20명이 포항으로 이주했다. 일본인 이주 숫자는 해가 바뀔수록 점점 많아졌다. 그들의 숫자가 급속히 늘어난 이유는 일본 정부의 이주정책 때문이었다. 1905년 통감부통치가 실시된 후 일본 정부는 일본어민들을 설득하여 한국으로 단체 이주를 장려하였던 것이다. /이상준 시민기자

    이상준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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