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0년, 사람을 운송하는 목적으로 맨체스터와 리버풀 간을 운행하는 세계 최초의 증기기관차가 개통되었다. 이후 증기기관차는 유럽 전역에 철도문명시대를 열었다. 이를 통해 인간은 더 빨리 달리게 되었고, 더 멀리까지 갈 수 있게 되었다. 기차는 사람만 운반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과 함께 하는 문화까지 운반했다. 유럽의 산업문명은 기차와 함께 더 빨리, 더 멀리까지 퍼져 나가 아시아의 동쪽 끝인 우리나라까지도 기어 와 닿았다.
1830년, 사람을 운송하는 목적으로 맨체스터와 리버풀 간을 운행하는 세계 최초의 증기기관차가 개통되었다. 이후 증기기관차는 유럽 전역에 철도문명시대를 열었다. 이를 통해 인간은 더 빨리 달리게 되었고, 더 멀리까지 갈 수 있게 되었다. 기차는 사람만 운반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과 함께 하는 문화까지 운반했다. 유럽의 산업문명은 기차와 함께 더 빨리, 더 멀리까지 퍼져 나가 아시아의 동쪽 끝인 우리나라까지도 기어 와 닿았다.

△최초의 발명자

앞에서 공학이 시대를 앞지르는 경우와 시대적 요구와 공학이 만나는 경우를 보았다. 그런데 시대가 공학을 요구한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 이것은 공학적 발명품이 한 개인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았던 많은 사람의 노력에서 기인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최초의 증기기관을 개발한 사람은 누구일까? 분명히 최초로 발명한 사람이 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최초의 발명자를 특정하기 어렵다. 증기기관을 최초로 발명한 사람으로 알고 있는 제임스 와트는 사실 증기기관을 대폭 개선하여 그 사용의 가능성을 확대한 사람이다. 와트보다 먼저 증기기관의 가능성을 타진한 사람은 토마스 세이버리였다. 그런데 세이버리가 만든 증기펌프는 우스터의 에드워드 서머셋(Edward Somerset·1603∼1667)의 발명품 모음집에 실린 증기펌프를 그대로 모방한 것이라고 한다.

최초의 발명자가 누구인지 밝히는 일은 왜 이렇게 어려운 것일까? 그 이유는 1600년경 후반부터 증기기관은 사람의 관심을 불러 모았으며, 여러 나라의 무수한 사람이 비슷한 시기에 증기기관을 연구했기 때문이다. 18세기에 이르면서 이러한 관심은 최고조에 달했고, 더 나은 증기기관을 만들려는 경쟁이 유럽 곳곳에서 활발해졌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묻자. 교통이나 통신이 발달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엇비슷한 생각을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곳에서 했던 것일까? 사람의 생각이 ‘텔레파시’ 같은 것으로 연결되어 있어서일까? 그 이유는 이런 비의적인 것과 관련이 없다. 많은 사람이 인간의 힘의 한계를 깨달았고, 다른 도움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대 전체가 증기기관과 같은 동력기관을 원하고 있었다고 해도 괜찮다. 그래서 저마다 증기기관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증기기관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비행기도 그랬다. 전보와 전화가 발명되자 먼 곳의 소식을 빠르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단지 소식만 듣는 것이 아니라 직접 가보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 이런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숱한 사람이 매달렸고 그 결과 비행기가 발명되었다.

우리는 1903년 라이트 형제가 세계 최초로 비행에 성공했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독일, 프랑스, 뉴질랜드 등 몇몇 국가는 자기 나라에서 최초의 비행이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2013년 코네티컷 주지사는 코네티컷 브리지포트에 거주했던 독일 이민자 구스타프 화이트헤드(Gustave Albin Whitehead·1874∼1927)가 1901년 세계 최초로 비행에 성공했음을 인정하는 법안에 서명하기도 했다. 세계 최초의 비행에 대한 논쟁은 비행기의 발명이 많은 사람에 의해서 유사한 시기에 동시에 이뤄졌다는 것을 방증한다.

누가 증기기관을 발명했는가, 누가 비행기를 최초로 발명했는가를 특정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시대적 요구였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시대적 요구를 읽었고, 많은 사람이 서로 엇비슷한 발명품을 생각하고 고안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시대적 요구를 누구나 읽을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뛰어난 공학자라야 시대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꿰뚫어볼 수 있다.

더 뛰어난 공학자는 그 시대가 요구하는 것을 남들보다 더 빨리, 더 실용적이며, 더 정확히 만들어 낸다. 잡스가 아이폰을 만들어내기 이전부터 스마트폰의 개념이 적용된 제품이 이미 시장에 출시되어 있었다. 잡스는 이러한 스마트폰의 연관 기술을 긁어모아 보다 더 창의적이고, 간편하고, 실용적인 것으로 혁신했다. 와트가 증기기관을 최초로 발명한 사람이 아닌데도 그를 ‘최초’로 기억하듯이, 스마트폰을 ‘최초’로 발명한 사람으로 잡스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공학은 해당 분야를 최초로 개척한 사람, 또 그 분야를 더 실용적이고 가치 있는 것으로 확장시킨 사람에게 ‘최초’라는 왕관을 내어준다.

△공학은 쓸모를 먼저 생각한다

야멸차게 말하자면 공학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멋지고 놀라운 것을 발명한 사람에게 공적을 돌리지 않는다. 공학은 더 효율적이고 더 실용적인 것을 발명한 사람에게 부와 명성을 동시에 가져다준다.

제임스 와트는 증기기관을 개발하여 영국에서 손꼽히는 부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증기기관‘차’를 통해 더 큰 부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차버렸다.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 공장에서 일했던 천부적인 발명가 월리엄 머독(William Murdock·1754∼1839)은 철도가 개설되기 40년 전인 1789년에 이미 증기기관차의 설계도를 완성했다. 하지만 와트는 “앞으로도 바퀴 달린 마차가 계속 사용될 것이다” 하면서 머독의 제안을 거절했다. 시대 속에 안주하려고만 한다면 우리는 결코 앞을 향해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증기기관차가 실제로 구현된 것은 1804년이며, 그 주인공은 리차드 트레비식(Richard Trevithick·1771∼1833)이다. 영국 웨일즈Wales에서 첫 선을 보인 이 기관차는 70명의 사람과 석탄차를 포함해 모두 25톤이 나가는 차량을 시속 8km로 이동시켰다. 웨일즈 탄광촌 사람은 말이 아닌 기계가 사람과 석탄을 나르는 광경을 처음으로 구경하는 호사를 누렸다.

하지만 그것 이상의 무엇은 없었다. 증기기관차는 그냥 신기한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을 실생활에 이용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사람을 태울 수 있어야 했고, 더 많은 석탄을 실을 수 있어야 했다. 무엇보다 속도가 느렸다. 시속 8km라면 말을 이용하는 것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그런 점에서 트레비식의 발명품은 2,000년 전 증기압을 이용하여 그리스에서 사원의 문을 여닫는데 이용한 헤론의 그것과 별 차이가 없었다.

공강일서울대 강사·국문학
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

공학은 효율성과 합리성을 추구한다. 어떤 기계를 설치하는데 만원의 비용이 든다면 그 만원보다 더 나은 가치를 창출할 수 있어야 한다. 시간을 절약한다거나, 생산성을 높인다든지, 부대비용을 절약한다든지 등 어떤 식으로든 만원이라는 설치비용에 해당하는 가치 이상을 발생시켜야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그 기술은 사장되고 만다. 이러한 효율성과 합리성을 가질 때 비로소 공학의 상상력이 만든 기술은 우리의 삶속으로 정착할 수 있게 된다. 증기기관차를 쓸모있는 것으로 만든 사람은 조지 스티븐슨(George Stephenson·1781∼1848)이었다. 스티븐슨은 트레비식의 기관차를 개량하여 시속 39km를 낼 수 있게 만들었다. 그는 당시 발달했던 제철기술을 활용해 기차가 다니는 선로를 개량함으로써 육중한 무게의 기관차가 실생활에서 달릴 수 있도록 만들었다. 기관차는 이제 신기하거나 괴물같이 무서운 기계가 아니라 일상속에서 유용한 기계로 자리잡게 된다.

제임스 와트나 스티븐슨은 부와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이들보다 앞서 획기적인 발명품을 선보인 파팽은 살해당했으며, 트레비식은 평생 가난하게 살았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역시 사람은 운 때가 맞아야 한다”거나, “닭 길러 족제비 좋은 일 시킨다”고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공학을 잘 몰라서 하는 말이다. 기초학문은 쓸모를 생각하지 않지만 공학은 쓸모를 생각한다. 그것도 다른 것에 비해 월등히 효율적이고 합리적이어야 한다. 비용에 비해 편익이 더 클 때 공학의 산물은 인간의 삶속으로 스며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