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

그거 소설 아니야, 정말 극적(劇的)이네, 같은 말과 동의어로 떠오르는 것은 영화 같네, 일 것이다. 드물긴 하지만 발생 가능한 사건을 두고 우리는 문학과 예술을 끌어들여 표현한다. 일찍이 셰익스피어는 “인생은 연극이고, 세계는 극장이다!”라는 공식에 충실한 극작가였다. 모든 것이 열려 있고 가능해진 르네상스 시대를 연극무대로 실현한 인물. 그래서인지 모르되 그의 드라마에는 예기치 못한 발견과 급전(急轉), 희귀한 살인과 배신이 난무한다.

영화관에서 ‘가버나움’을 보다가 문득 현실과 영화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하는 물음이 들었다. 작년에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가버나움’은 무거운 문제를 제기한다. 열두어 살 난 소년 자인이 부모를 고소한 것이다. 소년은 여동생 남편을 칼로 찔러 복역(服役)하고 있던 터. 범죄자 아들을 두었다고 괴로움과 고통을 호소하는 부모. 부모에게 아이를 그만 낳으라 일갈(一喝)하는 소년 자인. 무엇인가, 그의 속내는?!

우리는 자인의 나이를 알지 못한다. 동네 약국을 전전하면서 거짓말로 약사를 속여 마약 성분이 함유된 약을 구하는 자인. 그것이 그들 가족의 든든한 생존담보가 된다. 시리아 난민으로 6년 넘도록 베이루트에서 살아가는 자인의 가족. 하지만 자인의 동생들이 얼마나 되는지, 그것도 우리는 모른다. 얼마 전에 생리를 시작한 여동생 사하르. 그녀에게 생리대 구할 돈이 있을 리 없다. 속옷으로 생리대를 만들어주는 자인.

불편한 걸음걸이로 뒤뚱거리며 걸어가는 사하르. 그녀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잡아내는 영사기. 그토록 어리고 여린 소녀를 동네 점방 주인에게 팔아넘기는 자인의 부모. 사하르의 절망적인 거부와 자인의 맹렬한 투쟁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건장한 사내에게 넘겨진다. 딸아이를 팔아서라도 목구멍에 풀칠해야 하는 자인의 부모. 자식을 낳아 팔아버리는 비정(非情)한 부모를 인정할 수 없는 자인. 그들의 대결 구도로 영화는 진행된다.

‘가버나움’을 보면서 의외의 사실에 문득 놀라게 된다. 1982∼1983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과 80년대 말 내전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베이루트. 영화 ‘그을린 사랑‘은 레바논 내전 시기에 발생한 현대판 오이디푸스의 비극을 선연하게 재연한다.

가출한 자인이 케냐에서 온 불법 체류자 라힐과 만남으로써 영화는 예기치 못한 상황으로 객석을 인도한다. 거액을 주어야 얻을 수 있는 여권을 손에 넣으려는 라힐. 그녀의 어린 아들 요나스를 돌봐주며 생계를 잇는 자인. 그들의 불안하고 아슬아슬한 동거가 냉엄한 현실과 맞닥뜨림으로써 자인은 오갈 데 없는 요나스의 유일한 보호자가 된다. 관객은 자인이 언제 요나스를 포기할 것인지에 집중한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당연하고 익숙한 현실이므로!

베이루트에는 불법 체류자들의 아이를 사들여 외국에 내다 파는 인신매매단이 성행하고 있다. 자인은 말도 하지 못하는 젖먹이 요나스를 몇 번이나 포기하려고 한다. 자신의 경험과 타고난 심성 사이에서 갈등하는 자인. 그가 보여주는 영웅적인 투쟁과 인간애에 우리는 가슴 먹먹해진다. 그는 사하르를 포기한 부모와 확연히 다른 인간이다. 너무 이른 나이의 혼인과 임신으로 인한 사하르의 비극적인 운명과 자인의 칼부림이 영화를 극적인 소용돌이로 몰고 간다.

출생기록도 없는 소년이 법정에서 소리친다.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한 부모를 고소하고 싶어요!” 생물적 욕구로 자꾸만 아이를 낳는 자인의 부모. 그것에 반기(反旗)를 든 소년 자인. 천륜이 무너지는 세상을 아침저녁으로 확인하는 21세기 한국사회가 그나마 나을지 모르겠다는 막연한 안도. 어쩌면 그런 안도감으로 영화관을 맥없이 나섰는지도 모르겠다.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는 비극의 막장을 애써 외면하는 부실한 인간의 자화상을 확인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