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특집 콩트
'이제라도 알아주니'

삽화 /이철진 한국화가

1.

노인은 괴상한 전화를 받았다. 아무리 공권력을 우습게 아는 세상이라지만, 법 무서워하는 사람은 ‘경찰’이란 말만 들어도 가슴 떨리기 마련이다.

“경찰이라고요? 아니 왜 경찰이 나한테 전화를 한대요. …. 경찰만 오는 게 아니라 더 높은 데서도 와요? 왜요? 누굴 잡으러 오는 데요? …. 자식들 다 모이냐고요? 당연하죠. 설날이니까 다 모이죠. 내가 가진 재산은 없지만 명절에 코빼기도 안 비치는 녀석한테는 밭 한 뙈기 안 나눠줄 겁니다. 꼭 그래서 그런 게 아니라 제가 자식들은 잘 키웠다고 자부합니다. …. 뭐요, 제 자식이 사고를 쳐요? …. 사고 쳤다면서요? 경찰 찾아오게 만들면 사고 친 거지. …. 뭐가 밝혀져요? 사실은 내가 귀가 어두워서. …. 동네 사람들도 다 모으라고 했나요? 대체 뭘 잘못했는데요? …. 다른 사람 바꿔보라고요? 우리 마누라는 나보다 더 못 알아먹을 텐데. ….”

귀가 어둡기도 했고, 처음 들어보는 말도 많고, 무슨 소리인지 당최 알아먹을 수가 없었다. 자식들에게 전화를 걸어 무슨 일 저질렀냐고 물었다. 자식들이 하나같이 말했다.

“그거 보이스피싱이네요. 암튼 별의별 사기꾼들이 다 있다니까.”

그런데 그와 비슷한 전화가 몇 군데서 더 왔다. 분명히 자식 중에 하나가 무슨 일을 저질렀고 그것 때문에 무슨 일이 밝혀졌고 그래서 온다는 것이었다. 하도 답답해서 면사무소 옆 지구대를 찾아갔다. 지구대장도 무질렀다.

“보이스피싱 맞네요. 그것들 수법이 빤합니다. 결국 어디로 돈 부치라는 거거든요.”

“내가 바보여. 그런 거 당하게.”

“제가 이 면 파수꾼으로 염치가 없는 말씀입니다만, 2018년에만 우리 면에서 보이스피싱 당한 분이 열세 분이십니다. 이건 우리가 어떻게 막을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어요. 가급적 전화 안 받으시고, 받더라도 돈 부치라고 하면 얼른 끊어야 돼요. 설령 그게 자식 목소리랑 똑같더라도. 진짜 자식 목소리로 착각하고 당한 어르신이 한둘이 아니에요.”

경로당 늙은이들한테 말했더니 새로운 의견이 나왔다.

“누가 사채 썼구먼.”

“사채라니. 내 자식들은 사채의 사 자도 몰라.”

“자네가 아직 안 당해봐서 그런 말 하는 게지. 나도 내 자식이 그리 간덩이가 큰 줄 몰랐네.”

“우리 자식들은 안 그래.”

“자네 자식들한테 물려준 거 아니면 물려줄 거 있나?”

“없네. 알면서.”

“그럼 제 밥벌이 제가 알아서 하는 은수저 아니면 흙수저인데, 요새 젊은 사람들 사는 게 녹록지가 않아. 돈 들어갈 데가 쌔고 쌨다고. 부모형제한테 손 안 벌리고 급한 돈 쓸려면, 사채 쓸 도리밖에 더 있어?”

그냥 장난전화일 거라고 말해주는 이도 있었다. 요새 실업자가 하도 많아서, 할 일 없고 심심한 나머지 그런 이상한 전화질로 시간 때우는 사람들 허다하다고.

설 전전날에 또 전화가 왔다. 설날 오후 세 시에 방문하겠다고. 영감님 집에 꼭 있으셔야 한다고. 자식들도 다 있어야 한다고.

2.

차례 마치고, 노인이 을렀다.

“한 녀석도 급히 도망갈 생각을 마라. 너희 중에 사고 친 녀석이 분명히 있다. 죄를 졌든 사채를 썼든. 알고 대처했으면 좋겠다. 아무것도 모르고 멍하니 있다가 당하는 아비어미로 만들지 말아다오. 혹시 너희 형제끼리는 알고 있는 것 아니냐? 이 아비만 모르는 무슨 일이 있는 것이냐? 오늘 아비가 숨넘어가는 꼴 보고 싶지 않거든 어서 이실직고 하거라. 무슨 사정이 있는지 알기 전엔 세배 못 받겠다. 당신도 세배 받지 마.”

“아버지, 그거 보이스피싱 아니면 장난전화라니까요. 그걸 왜 자꾸 신경 쓰고 그러세요.”

“진짜 생사람 잡으시네. 엔간히 염려하시라고요.”

“몇 번이나 말씀드려요. 아무 일 없다고요.”

노인은 정말로 세배를 받지 않을 모양이었다. 이따가 딸·사위들이 온 다음에 받아도 될 터였다. 자식들이 일어섰다.

“일단 성묘하러 가시지요.”

“정말로 할아버지한테 부끄러움이 없는 녀석만 다녀오너라. 나는 거시기해서 너희랑 못 가겠다.”

노인은 자식들 데리고 아버지 무덤 앞에 섰을 때가 가장 뿌듯했다. 아무도 아버지의 행적을 믿지 않았지만, 노인은 믿었다. 자식이라 믿는 것이 아니라 진실이기 때문에 믿는 것이었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진실 때문에 평생 원통했다. 자기 힘으로는 풀 수 없는 억분이었다. 평생 힘없이 살아왔다. 힘이 있어야 밝힐 수 있는 진실이었다. 그래서 자식들에게 기대했다. 자식들을 힘 있는 사람으로 키우고자 했다. 자식들이 아버지를 대신하여 진실을 밝혀주기를 원했다. 그러나 자식들은 힘 있는 사람이 되지 못했다. 노인은 자식들이 원망스러웠다.

노인은 금방 자식들에게 미안해졌다. 자식이 못 되면 부모 탓인 세상이다. 옛날엔 대학까지 가르쳐주면 부모로서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준 것이었는데, 요새는 그것만으로 부족한 모양이다. 요새 기준으로 치면, 큰딸한테는 당연하고, 고등학교까지 보낸 큰아들 작은아들은 물론이고, 대학까지 가르친 셋째 넷째 막내딸한테도 해준 게 없는 아버지다. 그나마 다행이다. 남들이 복 받았다고 하지 않나. 자식들이 부모한테 손 안 벌리고 제 가족들 건사하며 살아준다고. 개천에서 용은커녕 용 발가락도 못 나는 세상에 그 정도면 개천에서 난 미꾸라지 푼수는 된다고.

3.

큰아들은 37년 전 고졸 특채로 대기업에 입사했다. 웬만한 대학교 들어가는 것보다 고졸 대기업 입사가 더 자랑이던 시절이었다. 대기업에서 인맥 없는 시골 출신 고졸학력으로 버티자니 남보다 더 열심히 일해야 했고 남이 가기 싫어하는 오지 일터를 전문으로 해야 했다. 중동 근무만 28년이었다. 당연히 명절 때조차 어버이를 뵐 수 없었다. 용돈도 많이 드리지 못했다. 이러저러해서 아버지가 평생 번 돈보다 큰돈을 두 번이나 말아먹은 일을 이제라도 아신다면 기절초풍할 것이다. 비로소 국내에 자리 잡게 되었다고, 부장이 되었다고, 이제 명절은 물론 달에 한 번씩 찾아뵙겠다고, 용돈도 많이많이 드리겠다고 큰 소리 땅땅 친 게 불과 1년 전이었다. 그런데 정든 직장을 나가게 되었다. 아직 쉰여섯인데 백수가 되고 말았다. 큰아들은 차마 아버지에게 털어놓을 수 없었다.

작은아들은 바람을 닮은 영혼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가출을 일삼았다. 유일하게 아버지한테 맞고 큰 자식이었다. 고등학교 졸업장을 딴 게 기적 같았다.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면서 <극한직업>에 나오는 별의별 일들을 섭렵했다. 더럽고 어렵고 위험한 일만 하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아비어미 속을 새까맣게 만든 주범이었다. 결혼이나 할까 싶었던 작은아들이 마흔 살 때 자식 딸린 여자를 데리고 왔다. 다행히 그 자식이 작은아들의 씨라고 했다. 어쨌든 처녀장가가 아니므로 처음엔 싫었지만 시나브로 작은며느리를 딸보다 아끼게 되었다. 작은아들은 정착했으며 형을 대신해 효자 노릇까지 했다. 차로 30분 거리에 살며 어버이가 호출하면 즉시 달려가 어디든 달려 가주는 자식이 되었다. 작은며느리의 내조가 아니었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작은아들은 어버이께 차마 말할 수 없는 사실이 있었다. 그 자식이 사실은 자기 자식이 아니라는 것을. 아버지의 피가 한 방울도 섞이지 않았다는 것을.

셋째아들은 공부를 잘했다. 대학도 모자라 대학원까지 다녔다. 대학원은 자기가 벌어서 다녔다. 금방 교수가 될 줄 알았다. ‘교수아들’은 노인의 가장 큰 소원이었다. 큰아들이 대기업의 ‘임원’이 되기를, 작은아들이 자기 가게를 가진 어엿한 ‘사장님’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그것은 비현실적인 바람 같았다. 연줄도 없고 보태줄 돈도 없는데 어떻게. 하지만 셋째아들이 교수가 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믿었다. 교수는 연줄이 없어도 돈이 없어도 오로지 실력만으로 될 수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가문의 영광’을 학수고대했다. 십 년이 넘도록 교수가 되지 못했지만 곧 될 거라고 확신했다. 셋째는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자기는 절대 교수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박사 학위가 없다는 것을. 큰딸은 중학교를 마치고 산업체고등학교로 진학했다. 말이 고등학교였지 공장살이였다. 노인은 큰딸에게 평생 미안했다. 그때 너무 어려워서 일반고등학교에 보내지 못했다. 인문계 아니어도 좋다, 제발 상고에만 보내달라고 철철 울던 중학교 때 딸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메어진다.

5년 전 큰딸이 자랑했다. 대학에 들어갔다고. 비록 디지털대학교지만 그래도 대학은 대학 아니냐고. 공부하는 재미에 산다고. 미안하다, 그때 네 엄마가 너무 아팠다. 엄마를 살려야만 했다. 늦게나마 네 소원을 스스로 이뤄서 너무 고맙다. 딸에게 용서를 비는 심정으로 고백한 적이 있었다. 그때 큰딸이 해준 말. 아빠, 다 알고 있었어요. 근데 거기서 만난 친구들 얘기를 들으니까 아빠처럼 근사한 분이 없더라고요. 큰딸은 아버지 얘기를 글로 써서 무슨 상을 받은 적도 있다. 상금으로 등심을 사다주었다. 맛나게 먹으면서도 자꾸 눈물이 나는 바람에 무슨 맛인지 몰랐다. 큰딸은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올 추석엔 아버지 어머니를 못 볼 수도 있다는 것을.

막내딸은 두어 달 일하고 한 달 몸과 마음을 추스르는 ‘투플러스 원 아줌마’로 살아가는 중이었다. 남편이 버는 돈으로는 부족했다. 재벌2세인 줄 알고 결혼했던 남편은 평범한 노동자였다. 생활은 할 수 있었지만 아이를 가르칠 수는 없었다. 처녀 때 경력을 살려 취직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마트 계산원, 병원 간병인, 청소 아줌마를 전전했다. 남편 직장에서 몇 달 째 월급이 나오지 않고 있었다. 아버지에게 돈 좀 빌려달라고 말해볼 참인데, 입이 떨어질는지 갑갑했다.

4.

딸과 사위들이 왔다. 아들며느리 세 쌍, 딸사위 두 쌍, 손자손녀 아홉. 빠짐없이 다 모였다. 명절 때마다 맛보는 기쁨이다. 아버님, 보고 계십니까? 아버지가 퍼트린 씨앗들 볼 만하지요.

아내는 누구를 바보로 안다. 아내와 자식들 저희들끼리만 속닥거리면서, 아버지는 끝까지 모르게 하자고 쉬쉬한다고 해서 모르겠는가. 정녕 모르게 하고 싶다면 지 어머니한테도 말을 하지 말아야지. 무슨 대단한 능력이 있어서 안 건 아니고 아내 일기를 몰래 훔쳐보고 알게 되었다. 이상한 전화를 여러 통 받고서 아내를 닦달해보아도 나오는 것은 없고, 혹시나 해서 집안을 샅샅이 뒤진 끝에 아내의 비밀일기를 찾아낸 것이다.

요즘 그 정도 근심걱정 없이 사는 이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쉰여섯 살 먹은 큰아들이 평생 다니던 직장 그만 뒀다는 게 별 대수인가. 직장 잘리는 사람이 한둘도 아니고. 앞으로 새 길을 잘 찾으면 될 테다. 둘째아들 자식놈이 다른 씨라는 것은 얼추 짐작하고 있었다. 하나도 안 닮았으니. 셋째아들아, 교수 못 되도 좋다. 교수 자리가 하늘에 별 따기라는 거 안다. 막내딸한테는 돈을 얼마나 해줘야 하는가. 다른 자식들 몰래 해줘야 할 텐데. 까짓것 얼마나 됐든 해주면 될 일이고. 무슨 암이라는 큰딸은 가슴이 먹먹할 뿐이다. 그저 요새 의술을 믿어볼 뿐이다. 믿고말고.

진심으로 바란다. 모두들 건강하게 별 탈 없이 잘 살기를.

“내가 너희들에게 할 말이 참 많다만, 꾹 참는다. 겨우 그런 일들 때문에 그런 전화가 왔을 리는 없고, 너희들이 기어이 아무 말도 않겠다니 할 수 없구나. 얼른 올라가봐라. 우리 집 딸들은 벌써 왔는데, 남의 집 딸들은 아직 출발도 안 했으니 사돈댁들에게 미안하다.”

5.

아들네들이 두 시가 되도록 꿈쩍도 안한다. 며느리들도 친정 가자고 재촉하지 않는다. 이것들이 무슨 일이 있구나.

동네 사람들이 하나둘씩 찾아온다. 명절 때 동네사람이 서로 집 찾아다니지 않게 다닌 지 오래되었다. 걸어 다닐 힘도 없거니와 회관서 날마다 본다. 근데 왜들 오는 거야? 아내와 자식들이 당연한 손님을 맞이하듯 한다. 그러고 보니 음식을 많이도 했다. 차들이 몰려온다. 면장과 주무관들, 지구대장과 경찰들, 소방대장과 대원들, 군의원. 여기까지는 그나마 낯익은 공무원들인데 그 다음부터는 잘 모르는 높은 공무원들…. 이거 뭐지? 누구를 잡으러 오는 건가? 자식들이 나한테 숨긴 게 분명히 있다.

노인은 괜히 무서워서 달아난다. 아버지에게로 간다. 고갯마루에서 보니 집 앞에서 저 멀리 정류장까지 별의별 차가 다 모이고 있다. 도대체 우리 집에 왜? 자식놈 중에 누구 하나가 큰일을 내도 크게 낸 게 틀림없다. 아내가 일기에 써놓은 일 말고, 필시 더 큰 일이 있다. 그 꼴을 볼 수 없다. 아버지 앞에 무릎 꿇는다.

아버지, 저 왔습니다. 무섭습니다, 정말 무서워요. 누가 무슨 일을 저지른 걸까요. 다른 사람은 아무도 아버지 얘기를 믿지 않았지만 저는 믿었습니다. 한 번도 안 믿은 적이 없어요. 그래서 아버지가 너무 자랑스러웠습니다. 아버지 같은 분이 있었기에 우리나라가 있는 거고 우리 자식들이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하면서 살고 있는 거 아닙니까. 아버지 앞에 정말 자식들 부끄럽지 않게 키우려고 그랬는데,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어도 단단히 있는 모양입니다. 저 안 놀랄 테니까, 아버지도 놀라지 마세요.

“할아버지, 저도 믿었어요.”

작은아들의 아들, 그러니까 피가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손자였다. 피가 섞이지 않은 것 빼고는 나무랄 데 없었다.

“뭘 말이냐?”

“증조할아버지가 독립운동가였다는 걸요.”

“네 아비가 얘기해주더냐? 자식, 내가 말할 때는 믿지 않더만. 아무도 안 믿는 얘기 밥 먹을 때마다 한다고 성질을 부리던 녀석이. 네 애비가 나한테 특히 맞은 이유가 있다. 다른 자식들은 안 믿겨도 믿는 척하는데 혼자서 못 믿겠다고 대드니 어느 아비가 참겠느냐.”

“근데요, 아빠가 저한테 그랬어요. 네가 할아버지의 믿음과 증조할아버지의 진실을 증명해야 한다고. 아빠는 믿지 않은 게 아니었어요. 독립운동가 자손임을 너무 자랑스러워하셨어요. 독립운동가 아들인 할아버지도 너무 자랑스러워하셨고요.”

“못 믿겠다.”

“할아버지 그거 아세요? 독립유공자 훈장을 받은 분이 만오 천 분에 가깝대요. 그런데 아직 주인에게 가지 못한 훈장(건국훈장, 건국포장, 대통령 표창)이 5천400개도 넘는대요.”

“나도 안다. 나처럼 억울한 분을 한둘 만난 게 아냐. 증명을 하래. 내가 그분 아들이라는 것을. 독립운동 하는 사람이 가족관계 다 밝혀가면서 운동 하냐? 자식들 살리려면 숨기면서 할 수밖에 없잖아. 니 증조부가 살아생전에 그런 거 내세우는 분도 아니었고……”

“저랑 숙부님이랑, 그밖에 많은 분들이 함께 찾아냈어요. 증명해냈다고요.”

허다한 양복쟁이 제복쟁이들이 텔레비전에서 가끔 보던 국립묘지 참배 분위기로 다가오고 있었다. 번쩍번쩍 빛나는 것을 들고.

“저희는 국가보훈처에서 나왔습니다. 오래 전에 아무개 의사(義士)님께 훈장을 추서(追敍)했는데, 이제야 자손을 찾게 되었습니다. 늦어서 송구합니다.”

“이제서 찾아오면 뭘 하냐고!”

“송구합니다. 훈장을 받아주십시오.”

“내가 얼마나 억울했는데. 아무도 안 믿어주고. 으이구 자식놈들아, 동네사람들, 높으신 분들, 이제는 내 말을 믿어준다는 거요? 우리 아버지를 믿어준다는 거요?”

모두가 무덤을 빽빽이 둘러싸고 절을 올렸다. 대한제국기에 마지막 의병이었으며, 1910년대에 은거하다가 3·1만세운동에 앞장섰던 그 사람. 일본헌병에게 끌려가 무자비한 고문을 받고 겨우 살아나왔던 사람. 죽을 때까지 한 푼 두 푼 모았던 돈을 상해 임시정부에 보냈던 사람. 어린 아들에게 말할 기운이 있으면,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비겁하지 마라!”라고 했던 사람, 그 사람의 오래된 무덤 앞에 훈장이 번쩍거렸다.

노인이 울먹였다.

“다들 감쪽같이 늙은이를 속여 먹였구먼. 너무 놀라서 죽어버릴 뻔 했구먼. …. 이제라도 알아주니 고맙소. 우리 아버지가 이런 거 바라고 독립운동한 분이 아니외다. 하지만 알아주니까 얼마나 좋아.”

무슨 기자도 온 모양이다. 심경을 말해달란다.

“설마 이게 다 꿈은 아니겠지요. 꿈이든 생시든 믿고 싶소. 우리 손자 말이 아직 훈장 못 찾아간 분이 오천사백이랍디다. 한 분이라도 더 자손을 만났으면 좋겠소.” <끝>


김종광(金鍾光)

1971년 충남 보령 출생. 1998년 계간 ‘문학동네’로 데뷔. 소설집 ‘경찰서여, 안녕’ ‘모내기 블루스’ ‘낙서문학사’ ‘처음의 아해들’ ‘놀러가자고요’와 장편소설 ‘똥개행진곡’ ‘조선통신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