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가족이 모이는 명절 연휴에 복과 함께 책을 나눠보는 것이 어떨까요. 사진은 인천차이나타운에 있는 ‘인천서점’이라는 북카페.  /김순희 수필가 제공
많은 가족이 모이는 명절 연휴에 복과 함께 책을 나눠보는 것이 어떨까요. 사진은 인천차이나타운에 있는 ‘인천서점’이라는 북카페. /김순희 수필가 제공

프로필 작성이 유행이던 시절 취미란에 독서라고 쓴 사람들이 많았다. 나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읽을 만한 책을 추천해 달라하면 말문이 막히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냥 있어 보이는 답을 적었을 뿐이었는데 질문을 받으니 당황스러울 것이다.

책을 가장 가까이 할 것 같은 직업군인 교수들에게 같은 질문을 해보았더니 ‘성경’을 비롯한 오래된 고전이 상위권을 차지했다. 신간은 ‘사피엔스’뿐이었다. 한 해 국민 평균 독서량이 한 권이 안 되는 대한민국이니 교수님들조차도 읽지 않는 대열에 서있다는 말이다. 곧 긴 설 명절 연휴에 접어든다. 하루쯤은 도서관으로 나들이 가서 새로 나온 책 한 권 읽고 평균 점수 올려주는 국민이 되어보자.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 박준 산문집

대여섯 번은 되돌려 본 드라마가 있다. ‘이번 생은 처음이라’ 는 제목도 특이하고 주연보다 조연들의 연기가 맛깔나서 믿고 보는 재미가 있다. 여자주인공이 드라마 작가인데 서점에서 박준의 산문집인 이 책을 찾아 달라한다. 서점 주인은 한 권 있던 것이 좀 전에 팔렸다고 하는데 먼저 사 간 사람은 남자 주인공이었다.

산문집은 끊어 읽기 좋아서 어머님이 호스피스 병동에 누워 계실 때 간이 침대에 기대서 읽은 책이다. 전문 간병인이 있어서 딱히 내 손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가물거리는 어머니의 숨소리가 조금이라도 달라질 때마다 가족이 곁에 있는 것이 위로가 될까싶은 마음에 자리를 지켰다. 그 시간을 함께 한 책이다. 282호에서 산소호흡기의 물방울 흐르는 소리 사이로 몇 숨일지 모르게 남은 시간을 흡입하는 소리, 몇 줌 들린다. 아무것도 해드릴게 없는 나는 일 없이 박준의 글을 한 줄 꿰며 어머니의 시간을 지웠다.

얼마 전, 친구가 이 책이 언제 출판된 것이냐 묻기에 겉장을 보고 2017년 7월에 나왔고 나는 9월 14일에 샀다니까, 구입날짜는 어떻게 기억하냐고 또 묻는다. 어느 해 책꽂이에 책을 펼치다가 이걸 내가 언제 왜 샀는지 궁금했다. 그날 이후 새로 산 책엔 날짜와 간단한 메모를 해왔다. 내 책이란 표시이기도 하고 10년 후에 펼쳐보면 10년 전의 그날의 나를 마주하기도 해서 기분이 좋다. 오늘 이렇게 쓴 일기가 시간이 지난 후 보면 웃음 짓게 되는 것처럼.

△서양미술사 / 곰브리치 지음

‘미술(Art)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 책 서론의 첫 문장이다. 도판 두 장을 비교하며 어느 것이 더 아름다운지 선택하라고 한다. 아마 보는 사람마다 다른 선택을 할 것이다. 아름다운 것에 관한 문제는 무엇이 아름다운 것이냐에 관한 취향과 기준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보통의 책들은 하나의 서문이 있지만 9쇄째인 내 책은 한국어판 서문 뒤에 12판부터 16판까지 여섯 개의 서문이 붙어있다. 처음 책을 내고 70여 년이 지나는 동안 흑백이었던 도판에 색을 입혔고, 새로운 도판이 추가되고 내용이 첨가될 때마다 새로운 판을 내며 아직도 살아있어서 팔리고 있다는 증거이다.

한국어판 서문에 작가는 50년 전(1993년 9월 한국어 초판이 나옴) 처음 이 책을 쓸 때만 해도 이렇게 세계적으로 사랑을 받게 될지 꿈에도 몰랐다고 썼다. 선사시대부터 20세기에 이를 때까지의 미술을 서술한 이 책은 두껍고 무거워서 읽는 동안 가지고 다니기도 힘들었다. 그림을 인쇄하기에 적당한 종이를 써서 더 무거운 것도 있겠지만 방대한 미술역사가 다 들어있어서 묵직한 것일 게다.

처음부터 찬찬히 보려고 애쓰지 말자. 그러다 책장을 덮어버리면 안되니 우선 도판만 훑어보다가 흥미가 느껴지는 시대부터 읽어도 무방하다. 사람을 좋아하면 화가들이 자신의 생을 기록한 자서전 같은 자화상을 보고, 풍경을 좋아하면 존 커스터블의 <건초마차>같은 그림부터 시작해보자. 이 책은 들고 다니기만 해도 뭔가 있어 보이는 사람으로 보일 테니 말이다.

△나의 아름다운 정원 / 심윤경 지음

성장소설이다. 어린 동구가 어려운 환경을 접하면서 자신의 위치를 찾고 성숙해가는 이야기이다. 모든 성장소설이 그렇듯 성장은 하나의 세계를 이해하고 다른 세계를 여는 과정이다. 시대적 배경은 1977~1981년이다. 난독증을 앓고 있는 10살 소년 동구를 중심으로 가족 간에 갈등과 억압이 70년대 말에서 80년대에 우리 사회에 벌어진 사건들과 겹쳐져 잘 맞물려 있다.

난독증이란 말조차 알지 못하는 세대에서 처음 동구를 알아봐 주는 선생님이 나타난다. 공부 못 하는 죄를 추궁당하는 것이 아니라 공부 못 하는 서러움을 이해 받는 것은 생애 처음이라 동구는 선생님의 가르침대로 따라간다. 글을 읽게 되고 그 과정에서 남을 진심으로 이해하는 방법까지 배우게 된다.

10살까지도 글을 읽지 못 하는 동구에게는, 아장아장 겨우 걸으면서 어느 날 혼자 글을 깨우친 천재 여동생 영주가 있다. 설정 자체만으로도 동구의 하루하루가 얼마나 힘겨울지 느낌이 올 것이다. 그런데도 영주를 가장 사랑하며 돌보는 사람이 동구이다.

누군가 재미난 책을 소개해 달라고 하면 나는 이 책을 권한다. 또 누가 좋은 책을 소개해 달라고 해도 이 책을 건넨다. ‘나의 아름다운 정원’을 읽은 첫 날, 내 유년의 아픈 기억이 떠올라 글 한 편을 단숨에 완성했었다. 쓰면서 아픈 기억이 많이 치유된 것은 물론이다. 화가 나는 날에는 이 책 140쪽을 펼쳐서 큰소리로 읽어보길 바란다. 세상의 욕이란 욕이 다 적혀 있으니 씹고 뱉고 까고 부셔보시라. 속이 후련해 질 것이다.

△질문의 책 / 파블로 네루다 지음

이 시집의 시들은 제목이 숫자이다. 1부터 74까지의 시에서 시인은 우리에게 계속 질문한다. 슬픔과 기억 중에서 어떤 게 혁대에 더 무겁게 달릴까? 무지개는 어디서 끝나나, 당신의 영혼에서인가 아니면 지평선에서인가? 겨울에 나뭇잎들은 뿌리와 함께 숨어 살까? 내가 잊어버린 미덕들로 나는 새 옷 한 벌 꿰맬 수 있을까? 바다의 중심은 어디일까, 왜 파도는 그리로 가지 않나?

물음에 등장하는 체게바라는 하늘나라에서 네루다에게 답을 했을까. 프랑스의 시인 보들레르는 울 때 검은 눈물을 흘렸는지 알려주었을까, 루벤 다리오, 랭보, 공고라, 빅토르 위고, 폴 엘뤼아르, 호세 마르티,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도 현명한 대답을 했을까, 히틀러는 지옥에서 어떤 강제노동을 하고 있는지 네루다는 보았을까?

이 시집의 작품들은 그 연들이 모두 물음표로 끝난다. 영역자에 따르면 물음표가 모두 316개라고 한다. 그 많은 물음표로도 모자라 작품 ‘31’에서 네루다는 자신이 이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게 하려고 왔는지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지 묻고 있다. 끝내는 ‘파블로 네루다라고 불리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이 인생에 있을까?’ 라며 우리에게 깊은 고민을 던져준다. 네루다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져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대했다.

△윤미네집 / 전몽각지음

‘윤미 태어나서 시집가던 날까지’ 라고 부제가 붙었다. 빨간 표지를 보자마자 한눈에 반해버렸다. 눈도 뜨지 않은 갓난 아이, 조그만 마당에서 노는 모습, 초등학교 들어갈 때, 아이들이 심통 부리는 얼굴, 대학 합격 발표가 있던 날, 이 모든 일을 사진으로 기록한 아버지의 사랑이 담긴 책이다.

나는 백일사진도 돌사진도 없다. 딸은 하나도 많다는 집의 둘째 딸로 태어난 덕분이다. 가장 어릴 때 사진이 대여섯 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가 언니 손을 잡고 선 사진이다. 그때는 카메라가 귀했기에 그 후의 사진들도 주로 소풍날 단체사진이거나 운동회나 수련회 같은 행사의 조그만 등장인물일 뿐이다.

윤미는 멋진 아버지를 둔 덕분에 성장소설을 사진으로 썼다. 8평짜리 마포아파트의 화장실을 암실로 쓰면서 현상을 하고, 이름도 생소한 ‘라이카’ 카메라부터 코닥 Tri-X라는 필름으로 찍어 코닥

D-76으로 현상처리 했다고 한다. 제목은 ‘윤미네 집’이지만 동생 윤호 윤석도 사진에 등장하고, 특히 윤미를 키운 엄마도 단골로 나온다. 아버지의 사랑 가득한 눈으로 찍었기에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감동이 밀려온다.

뒷부분에 사진의 얽힌 날짜와 더불어 성장이야기도 실려 있고 윤미씨와의 인터뷰도 실렸다. 이 책은 절판되었다가 많은 사람들의 요구로 다시 재발간 됐다. 책을 읽는 이도 독자이고 오래 살아있게 하는 일도 독자의 몫이다. /김순희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