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념: 생각의 틀

우리는 너무도 쉽게 생각의 틀에 갇힌다. 파란 안경을 쓰면 세상이 파랗게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생각 바깥으로 나가면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세상의 바깥은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의 바깥엔 또 다른 세상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저마다 사물에 대한 관념을 가지고 있다. 관념이나 개념을 그냥 대상에 대한 이미지라는 말로 바꾸어 생각하면 쉽다.

사과를 떠올려보라. 어떤 사과가 떠오르는가? 누군가는 빨갛게 익은 탐스럽게 생긴 사과를 떠올릴 것이고, 어떤 사람은 연초록색의 사과를 떠올리기도 할 것이다. 우리가 대화를 할 수 있는 것은 대상에 대한 개념과 이미지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만약 대상에 대한 개념을 다른 사람과 다르게 알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감자의 실종

백수린의 소설 ‘감자의 실종’은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 실제의 세계가 아니라 언어일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감자(potato)라는 단어를 강아지(puppy)로 오해하고 살아온 여주인공이 있다. 그녀는 어느 날 회사 동료가 “나 오늘 감자 삶아왔어”, “우리 오늘은 감자탕 먹을까?”와 같은 말에 경악한다.

그녀는 동료가 ‘강아지’를 먹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감자’가 ‘강아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주인공은 뒤늦게 깨닫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더 큰 문제가 발생한다. ‘감자’를 ‘강아지’로 오해했다면 그동안 그녀가 알고 있었던 ‘강아지’는 무엇일까?

그녀는 사람들이 말하는 ‘강아지’를 ‘신념’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감자’를 ‘강아지’로, ‘강아지’를 ‘신념’으로 알아왔다면 ‘신념’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녀는 단어공부를 새롭게 시작해야 할 정도로 혼란한 상황에 빠져들게 된다. 그러면서 자신이 하는 말 전체를 의심하게 되며, 다른 사람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고 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게 된다.

결국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혼돈의 상태에 이르고 만다.

‘ㄱㅏㅇㅇㅏㅈㅣ’라는 글자는 기호일 뿐이다. 강아지라는 실체적 대상과 ‘ㄱㅏㅇㅇㅏㅈㅣ’라는 기호는 서로 분리되어 있다. ‘ㄱㅏㅇㅇㅏㅈㅣ’라는 글자가 강아지라는 대상을 지칭하게 된 데는 어떤 필연적이고 절대적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다. 프랑스의 언어학자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1857∼1913)는 이것을 언어의 자의성이라고 불렀다. 만약 ‘ㄱㅏㅇㅇㅏㅈㅣ’와 실제 강아지가 필연적이고 절대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면 감자와 강아지를 헷갈릴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ㄱㅏㅇㅇㅏㅈㅣ’와 실제 강아지는 꽉 맞물려 있어 ‘ㄱㅏㅇㅇㅏㅈㅣ’라는 글자를 강아지인 것처럼 느낀다. 그런 점에서 언어는 곧 실제다.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정신이 아니라 겨우 이런 글자나 말이다. 그것도 자의적이며 우연적이기까지 한 그런 언어에 기대어 정신을 함양한다. 그런 점에서 언어는 나약하고 연약하다. 그런 것 위에 세워진 정신이라고 불리는 관념은 또 얼마나 초라한가?

△나약하지만 동시에 견고한 관념에 대해

관념은 강하지도 않고 절대적이지도 않다. 그런데도 관념을 신봉한다. 리차드 트레비식은 제임스 와트보다 수십 년이나 일찍 최초의 증기기관차를 만들었지만 가난하게 살아야 했다. 왜냐하면 당시의 사고방식이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사람은 생물을 창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느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증기기관차는 인간이 창조해낸 말(馬)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느님의 징벌이 있을 것이라는 불안, 그런 어리석은 믿음 때문에 사람은 이것을 교통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을 꺼렸다. 실제로 기관차가 널리 사용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이렇게 우리의 관념은 강하며 실제 생활에서 물리적 힘을 발휘한다.

사과는 처음부터 빨간 것이 아니라 꽃에서부터 시작해서 녹색이 었다가 점점 붉어진다. 그것도 특정한 사과가 그럴 뿐, 익어도 녹색인 사과는 얼마든지 많다. 자신이 알고 있는 관념이 절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그것이 옳은 것이라고 생각할 때 위험해진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피부색을 ‘살색’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살색이 황색이나 살구색에 가깝다는 것을 진리인 것처럼 받아들이면 검은색 같은 다른 피부색을 가진 사람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그때부터 인종에 대한 편견이 생겨난다.

이러한 차별의 극단에 히틀러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히틀러는 독일 국민에게 게르만 민족이 가장 우수하고 위대한 민족이라는 관념을 심었다. 이러한 관념이 심겨지자 독일 국민은 히틀러의 부하가 되기를 자청하며 전쟁터에 나가 장렬히 전사했고, 수백만 명의 유대인과 집시를 학살했다. 관념은 미약하고 볼품없는 언어를 기반으로 그보다 더 별 볼일 없는 우리의 인식 속에 싹을 틔우지만 그것이 자라나면 그 관념은 튼튼히 뿌리내리고 목숨을 지푸라기처럼 여기게 만든다. 자신의 관념을 믿고 거기에 의지할 때 그리하여 그 관념 속에 안주하고 평안을 누리고자 할 때 엄청난 폭력을 낳게 되고, 그 대가는 자멸이다.

 

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
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

△관념: 한계이자 자유

왜 인간은 자신이 가진 관념이나 신념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왜 잘못된 관념을 쉽게 깨뜨리지 못하는 것일까? 뇌과학자에 따르면 인간의 뇌가 기존의 관념을 고수하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오른손에 20kg 짜리 아령이 묶여 있다고 생각해보자. 가급적이면 왼손을 사용하고자 할 것이고, 왼손으로 할 수 없는 일에만 오른손을 사용하려 할 것이다. 우리의 뇌에도 이러한 아령, 즉 관념에 묶여 있어서 새로운 생각을 좀처럼 시도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관념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대상에 대한 아무런 관념을 갖고 있지 않을 때 어떤 행동을 보이는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낯선 장소에 가거나, 한 번도 본 적 없는 동물을 보거나, 한 번도 맛본 적 없는 음식을 먹는 일은 얼마나 두려운가. 이런 것에게서 무서움을 느끼는 이유는 그것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칠흑같이 어두운 동굴이 무서운 이유는 그 속에 어떤 무시무시한 괴물이 살고 있어서가 아니라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어서다.

이처럼 정말 무서운 것은 알 수 없음에 있다. 관념은 대상을 인식할 수 있도록 만든다. 그 인식이 설령 왜곡된 것이라 해도, 그 왜곡을 딛고 대상에 대한 앎으로 나아갈 수 있다. 핵심은 생각이 잘못될 수도 있음을 간파하는 것이다. 관념을 가질 때 문제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생겨난 관념을 신봉할 때 모든 문제가 생겨난다.

관념은 우리의 생각을 가두고 사물의 특정 부분만 보게 만든다. 하지만 이러한 관념 때문에 대상에 대한 인식과 정보를 모을 수 있다. 관념은 기회이자 동시에 자유다. 관념을 잘 이용하여 세계를 인식하기도 해야겠지만 그렇게 사용된 관념을 버리고 새로운 관념을 슬기롭게 받아들일 준비도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