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휘논설위원
안재휘 논설위원

조선은 사대부들의 지독한 사색당파로 망한 나라다. 학자에 따라서는 ‘당쟁’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볼 일이 아니라는 관점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객관적 시각의 통사(通史)로 볼 때 조선시대의 당파싸움은 미화될 여지가 없다. 사색당파의 논쟁들은 하나같이 ‘백성’과 ‘국가’를 위하는 충정을 명분으로 걸어놓고 있지만 그 행태와 뒷이야기에는 냉혹한 흑백논리와 더럽고 편협한 욕망만 우글거린다. 절대권력자인 왕을 지렛대로 쓰려는 그들의 음모는 필사적이었다. 지금 이 나라를 이끌어나가고 있는 청와대와 여야 정치권의 행태를 보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느낌이다. 옛날에는 세상을 움직이는 축이 임금이었던 반면, 지금은 국민의 지지율이 권력의 향배를 가름한다는 측면이 다를 뿐이다. 예전에는 왕이 얼마나 영특한가의 요소가 권력을 가르고 국운을 결정짓는 핵심변수였고, 지금은 국민들이 과연 얼마나 현명한가가 성패의 관건이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뒤집을 수도 있다(水可載舟 亦可覆舟)’는 공자의 말씀은 오늘날에도 ‘민심’의 요체를 깨닫게 하는 절묘한 비유로 다가온다. 그러나 공자의 이 말은 백성의 마음이란 결코 한곳에 머물러있지 않음을 예고하는 고약한 은유로도 읽어야 마땅하다.

현대정치에 있어서 정치권은 끊임없이 국민의 어리석음을 파고든다. 특히 이 나라 정치인들이 최대한 악용하고 있는 무기가 바로 포퓰리즘(populism)이다. 절대다수의 정치인들은 포퓰리즘이라는 바이러스를 어떻게 구사해 민심을 훔치고, 권력을 얻어 누릴 것인가에 골몰해 있다. 그들 입에서 나오는 ‘민생’이니, ‘애국’이니 하는 용어들은 민심을 홀리기 위한 과장된 형용사요 궤변의 꾐수일 따름이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벌어지고 있는 정책의 혼선과 부작용들은 대개가 자승자박(自繩自縛)의 테마들이다. 우리는 작금 국가 주요정책이 포퓰리즘의 경연 속에서 함부로 다뤄질 때 어떤 참담한 혼란으로 귀결되는지를 절절히 체험하고 있다. ‘최저임금’ 문제가 그렇고, ‘탈원전’ 문제가 그렇다.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과 섣부른 ‘탈원전’이 국민 삶에 어떤 처참한 결과로 나타나는지는 이미 충분히 입증됐다. 그 시발점이 바로 지난 대선이다. 민주노총을 비롯한 노동계와 진보 시민단체가 지지세력의 핵심인 문재인 후보와 더불어민주당이 최저임금 대폭 인상과 ‘탈원전’을 덜컥 공약으로 내세운 것이 비운의 출발점이었다. 정책은 방향이 중요하다.

그러나 방향이 옳다고 무조건 “당장 시행하겠다”고 공약하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범죄적 선거행태다. 어설픈 선거공약 하나가 나라를 말아먹을 수도 있음을 공연히 묵과하는 정치인들의 언행이란 참으로 사악하다. 당장 표가 된다고 판단되면 무조건 내놓고 보는 엉터리 공약들은 반드시 치명적인 시행착오를 불러온다. 최저임금을 감당해야 하는 중소 영세사업자들의 처지를 전혀 헤아리지 않고 폭증을 감행해버린 정부의 처사는 아무리 곱씹어도 이해가 안 간다. 이유라곤 그저 ‘공약이었다’는 것 하나뿐인데, 세상 물정 모르는 윤똑똑이 얼치기 지식인들의 곡학아세를 앞세워 그런 하책을 쓴 이면은 도무지 헤아려지지 않는다. ‘탈원전’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핵발전기술 강국 ‘대한민국’의 위상을 하루아침에 개차반으로 매장해버린 결정적인 실수를 대체 어찌할 참인가.

문제는 여전히 포퓰리즘 바이러스에서 벗어나지 못한 정치권이 지지율을 떠받치는 맹종세력의 눈치만 살핀다는 사실이다.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에겐 세금 많이 걷어서 나눠주면 입을 막을 수 있다는 심보다. 나라야 망하건 말건 권력만 유지하면 된다는 가치관에 갇혀 살던 조선시대 무한 당쟁 앞잡이들의 행태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포퓰리즘 바이러스의 노예로 온존하는 사특한 정치꾼들과 어리석은 민심이 합작해내는 이 불량한 정치행태를 대체 어찌해야 좋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