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의 재발견 소설가 김별아의 월성을 걷는 시간
④ 처음 만난 월성, 다시 만난 월성

북극의 한기가 남하하면서 한반도를 꽁꽁 얼린 날이었다. 북극하면 빙하와 에스키모와 새하얀 곰부터 떠오른다. 여름에는 해가 지지 않는 백야 현상이 나타나고 겨울에는 해가 뜨지 않는다는 곳이다.

그런데 뺨이 에이고 손이 얼어붙는 것이 ‘북극 한파’ 때문이라니, 공간의 경계가 일시에 사라진 듯 야릇한 기분이 든다.

월성 앞에 선 기분도 그만큼이나 기묘하다. 동지섣달 칼바람 속에서 시간의 멀미증을 느끼며 천년 왕성의 흔적을 찾아 헤맨다. 조심스럽게 모습을 드러낸 월성의 속살은 비밀 같기도 하고 상처 같기도 하다.

맹추위에 중단한 발굴조사 구역의 파란 방수천 위로 까마귀 떼가 검은 날갯짓을 하며 날아간다. 영화의 천년과 폐허의 천년이 한꺼번에 물밀어온다.

 

2014년 이후 두번째 방문

발굴 주목받은 지 몇 해

여전히 인적 드문 ‘월성’

매시간 정각 들리는 성덕대왕신종 소리

신비로운 울림에 기묘한 떨림으로 기억

내가 월성을 찾은 것은 두 번째다. 2014년 1월 고3 엄마가 되기 직전에 잠깐 짬을 내어 혼자 여행을 떠났다. 무작정 잡아 탄 버스가 경주행이었던 건 우연이자 필연이었다. 귀향의 안도감과 여행지의 설렘을 동시에 주는 곳, 졸작 ‘미실’의 무대로 소설 속에서 하세월 뛰놀고도 여전히 미로를 헤매는 느낌을 주는 곳이 경주이기 때문이다.

비수기 평일이라 게스트하우스 4인실을 혼자 썼다. 방은 덥고 건조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버스를 잡아타고 여느 관광객처럼 불국사와 석굴암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남들이 모두 하듯 대릉원과 첨성대를 ‘도장 깨기’한 후에 도둑괭이처럼 남몰래 오른 곳이 월성이었다.

그때의 월성은 지금의 월성이 아니었다. 그저 석빙고 인근의 도도록한 언덕, 잡풀이 함부로 돋고 오솔길이 맥락 없이 이어진 구릉이었다. 그곳이 신라의 왕성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간간이 지나는 산책객 외에 일부러 발걸음을 하는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패망한 왕조의 쇠락한 왕성, 외적의 침범으로 잿더미가 된 황성 옛터. 월성은 삼한을 통합한 제국의 수성 따윈 까맣게 잊은 채 초식동물처럼 나부죽이 엎드려 침묵하고 있었다. 내 눈에 새겨진 천년 폐허의 마지막 모습은 그러했다.

꼬박 5년이 지난 후, 다시 월성을 찾았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5년이면 절반쯤은 새롭고 절반쯤은 여전하리라. KTX로 서울에서 포항까지 가서 신문사 미팅을 마친 후 시외버스를 타고 형산강을 따라 경주에 닿았다. 그리 늦은 시간이 아니었는데도 경주의 밤은 어두웠다.

연말이라 숙소를 구하기 여의치 않아 버스터미널 근처에 미니호텔에 여장을 풀었는데, 아침에 숙소를 나섰을 때는 좀 놀랐다. 동네의 풍광이 요즘 식으로 말하면 ‘혼돈의 카오스’였다. 야릇한 간판을 내건 모텔, 외국인을 포함해 소박한 여행자들이 모여드는 게스트하우스, 단독주택과 빌라, 교회와 식당, 심지어 노인복지회관과 자동차정비소가 한동네에 처마를 맞대고 있었다.

“경주가 왜 이렇지?”

인터넷 지도가 이끄는 대로 골목을 지나노라니 모텔 창문에서 분명히 보일 풍경에 불쑥 고분이 나타난다. 사는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풍경일지라도 외부인에게는 몹시 낯설고 당황스럽다.

“어디를 파도 유물이고 유적이니 후손들의 궁여지책이 아닐까요?”

이번 여행에 길벗이자 기사 노릇을 할 운전병 만기 전역자 아들의 답이다. 아들은 덕후(마니아) 중에서도 기이한 덕후인 ‘폐덕(폐허 덕후)’이라 “경주에 내가 좋아하는 모든 것이 모여 있다!”며 흥분해 따라나선 터였다.

그곳이 경주다. 생과 사가, 욕망과 허무가 서로 민낯을 바라보고 섰다. 그것이 경주다.

신라 사람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첫날은 자동차를 이용하지 않고 오직 두 발로 월성을 걸어보기로 했다. 숙소에서 길을 건너자마자 불쑥 나타난 고분은 마총과 금관총을 포함한 노서리고분군이었다. 거기서 길을 건너면 동남쪽으로 천마총과 황남대총으로 유명한 대릉원이고, 대릉원에서 길을 따라 가면 첨성대 그리고 계림이 나타난다.

이때부터는 발걸음을 늦추고 상상력의 보폭을 넓혀야 한다. 천년 전, 천오백 년 전 그때의 사람들처럼 천진하게 혹은 위엄 있게 주위를 둘러본다. 월성 입구에서 3~4백 미터 앞쯤에는 오뚝하고 어여쁜 첨성대가 하늘을 향해 머리를 열고 있다.

거기서 월성 쪽으로 더 다가가면 미추이사금을 시작으로 56명 중 38명의 왕을 배출한 김씨의 시조 김알지가 ‘발견’된 계림이 있다.

지금은 고목(古木)의 숲이지만 그때는 탄생의 생기를 품은 울울창창한 숲이었을 것이다. 계림을 지나면 주춧돌 자리가 선명한 건물지와 함께 철망을 친 양옆으로 현장 보호를 위한 방수천이 줄지어 있는 구역이 나타난다.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 광화문 바깥으로 종로를 향해 6조 거리가 형성되어 있듯 신라의 관아 건물로 쓰였을 것이라 추측되는 외곽의 건물지와, 자연 하천인 남천(옛 이름 문천(蚊川))과 함께 월성을 외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인공적으로 조성한 해자(垓字, Moat)의 발굴 현장이다. 그 사이로 난 조붓한 길을 따라 가면 아까의 낮은 구릉이 ‘열리고’ 그 안에 편편한 터가 나타난다. 바로 월성이다.

바람 부는 월성 안으로 한 걸음을 내딛는다. 차갑게 언 땅 위로 흙바람이 뽀얗게 분다. 발굴지로 주목받은 지 몇 해가 지났건만 2014년 그때와 마찬가지로 인적은 드물다. 지금껏 월성을 찾는 발길은 월성 자체보다 내부에 자리한 ‘석빙고’ 때문이었다.

석빙고는 옛 시절의 냉장고다. 요즘도 정전이 되면 어둠보다 냉장고가 멈춰 음식이 상해버릴까 하는 걱정이 앞서는 지경에, 근대 이전의 석빙고는 나라에서 관리할 만큼 중요한 곳이었고 얼음은 임금님이 신하에게 애정의 표시로 내려주는 하사품이기까지 했다.

그러니 석빙고가 자리하고 있다는 건 월성이 그만큼 사람이 살기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렷다.

하지만 월성 내 석빙고는 신라의 유물이 아니라 조선 영조 때 만든 것이다. 남한에 딱 6개, 안동, 현풍, 경주, 청도, 창녕, 영산에 남아있는 석빙고라지만 집집마다 냉장고는 물론 김치냉장고와 냉동고까지 보유한 세상에 대단한 흥밋거리는 아닌 듯하다.

내부를 들여다보니 깊은 석굴이 썰렁하다. 때마침 청소년 자녀를 포함한 한 가족이 구경을 왔다가 석빙고를 보더니 탄식을 터뜨린다.

“애걔, 이게 다야?”

어린 학생의 실망한 목소리에 경주로 떠나오기 전 들었던 목소리가 겹친다.

“월성? 그게 대체 어디야?”

월성을 취재하러 간다고 말했을 때 주변의 반응은 대개 비슷했다. 나름 식자들이고 경주 여행도 여러 차례 했건만 월성은 잘 모르고, 알아도 역사책에서나 읽었다고 했다. 그들에게 어떻게 월성을 알릴 수 있을까?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들의 숫자만큼, 혹은 그 이상의 것들이 빠르게 지워지는 경조부박한 세상에서 무엇으로 잠시나마 천년의 시간을 돌이키게 할 수 있을까?

“덕업일신 망라사방(德業日新 罔羅四方)!”

월성에 오르면 바야흐로 신라가 사방에 펼쳐진다. 지증왕이 ‘덕업이 날로 새로워져 사방을 망라한다’는 의미로 국호를 ‘신라’로 정한 뜻이 왕성의 앉음새로도 느껴진다.

남산 그리고 남천을 등지고 서면 오른편 동쪽으로 낭산과 토함산이, 왼편 서쪽으로 선도산이, 앞쪽 북쪽으로 소금강산이 우뚝하다.

동북쪽에 황룡사지와 분황사가, 서남쪽에 나정과 오릉이, 북서쪽 사선 방향으로 대릉원과 쪽샘, 노동동과 노서동의 고분군이 펼쳐진다. 지금은 도로에 끊겨 나뉘어져 있지만 하나의 궁성이었던 동궁과 월지, 그리고 경주국립박물관이 자리한 남궁과 성동동 전랑지에 자리했을 것이라 추정되는 북궁까지 포함하면 장대함이 더하다.

신라의 수도 서라벌은 왕성으로부터 뻗어나가는 일직선대로와 격자형의 택지 조성으로 완벽하게 아름다운 계획 도시였고, 그 모두의 중심에 월성이 있었다.

물론, 여전히 황량하다. 아직은 적막하다. 하지만 겨울의 동토가 이미 봄의 생명을 품고 있듯 한때 이곳에서 융성했던 왕조의 비밀이 발밑에서 꿈틀거리고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눈앞의 보자기만한 시간이 현재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조선시대에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도 현재다. 미학적이건 정치적이건 한 사람이 지닌 감수성의 질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가름될 것만 같다.”

고(故) 황현산 선생은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에서 한 사람의 감수성의 수준이 질적으로 얼마나 높고 낮은가는 현재의 두께감에 좌우된다고 지적했다. 신라, 경주, 그리고 월성. 그곳에서 느끼는 현재의 두께는 천년인가? 아니면 고작 눈앞의 지금뿐인가?

월성의 동쪽 끝 성벽, 경북매일신문 이용선 사진부장의 추천을 받아 그곳을 찾았다. 마침 적당히 편평한 돌까지 있어 걸터앉아 기다리기에 맞춤하였다.

동쪽 성벽에서 내려다보는 바로 아래 국립경주박물관이 있고, 그 안뜰에 일명 에밀레종이라 불리는 성덕대왕신종이 걸려 있다. 성낙주의 ‘에밀레종의 비밀’(푸른역사,2008)을 통해 성덕대왕신종이 에밀레종의 인신공양 설화보다는 만파식적 기원설(황수영,1982)에 근접한다는 주장을 매우 흥미롭게 읽은 바, 월성 성벽에서도 들린다는 영묘한 종소리를 꼭 들어보고 싶었다.

원래는 봉덕사에 있다가 영묘사로 옮겼다가 봉황대에 보호되던 것을 국립경주박물관 경내로 이전한 성덕대왕신종은 문화재 보호를 위해서인지 직접 쳐서 소리 내는 대신 매시간 정각에서 20분 간격으로 녹음한 종소리를 들려준다.

시간이 되었다. 과연 종소리가, 시인 김광균이 ‘외인촌’에서 묘사한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가 월성 성벽까지 은은히 닿는다. 3번씩 6번, 18번이 이어지는 것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녹음된 소리이니 마냥 감격하기에도 객쩍다. 그렇지만 신비로운 울림만은 부정할 수 없으니, 성덕대왕신종의 종소리가 폐허를 깨우는 장면은 기묘한 떨림으로 오래 기억될 듯하다. 경주, 그리고 월성에 대한 신고식으로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이제부터 좀 더 두텁고 풍부한 현재를 위해 천천히 월성의 지난 시간 속으로 들어가 본다. 암호 같기도 하고 북극성 같기도 한 문헌과, 고고학이라는 과학과, 폐허에서 꽃을 피울 수 있는 상상력을 등롱 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