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광해의 경북의 멋과 맛을 찾아서
③ 전통적인 국수란 무엇일까?

밀은 귀했다. 밀가루는 진짜 가루, ‘진가루’라고 불렀다. 사진은 경북 예천산 국내산 백중밀이다.

‘전통’은 좋은 것이다. 전통을 계승해야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어떤 것이 전통일까? 전통의 실체를 알아야 계승, 발전이 가능하다. 전통적인 국수는 무엇일까?

‘음식디미방’에는 두어 종류의 국수가 등장한다. 난면(卵麵)과 메밀국수 등이다. 전분(녹말)으로 만든 국수도 있다. 난면, 메밀국수, 전분국수를 재현하여 선보이는 것이 전통을 계승하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난면은 계란으로 반죽한 국수다. 오늘날 이탈리아 파스타와 닮았다. 메밀국수는 오늘날의 막국수다. 우리가 먹는 막국수는 전통적인 메밀국수를 전승한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재료, 주방 도구 등 모든 것이 달라졌다.

숱한 식재료가 종자 개량 등을 통하여 변화, 발전했다. 없던 식재료가 나타나고, 흔했던 식재료가 사라진다. 각종 그릇, 주방용기도 달라졌다. 냉동, 냉장기술이 발달하고 도정(搗精) 방식도 달라졌다. 오늘날 우리는 예전 임금이 먹던 쌀보다 더 희고 고운 것을 일상적으로 먹는다.

전통 계승? 음식이 아니라 그 음식을 만들었던 정성과 정신을 되찾아야 한다. 음식은 고분(古墳)에서 찾아낸 유물이 아니다. 전통음식을 복원하자? 우습다. 고분의 토기를 복원하는 것도 의미가 없다. 하지 않는다. 음식은 복원의 대상이 아니다. 복원해도 쓸모가 없다.

음식은 변화, 발전한다. ‘음식디미방’의 국수는 복원의 대상이 아니다. 복원해도 소용없다. 맛없다. 이제는 먹기 힘들다. 차라리 오늘날의 국수가 낫다. 복원은 ‘음식디미방’ 기념관에서나 할 일이다.

‘음식디미방’에서 찾아야 할 ‘전통’은 국수를 귀하게 여겼던, 그래서 ‘봉제사접빈객’에 늘 등장하는 그 국수를 만든 정성과 정신이다. 장계향의 국수가 전하는 의미와 원리다.

‘음식디미방’에서는 밀가루를 ‘진(眞)가루’라고 불렀다. 한반도에서는 밀 경작이 어려웠다. 소량 생산된 밀은 대부분 누룩의 재료로 쓰였다. 극히 일부만이 식재료로 쓰였다. 중국에서 들여오는 밀도 귀했다. ‘음식디미방’의 밀가루는 ‘진짜 가루’였다.

가장 흔한 국수의 재료는 무엇이었을까? 메밀이었다. 메밀은 교맥(蕎麥) 혹은 목맥(木麥)이다. 메밀은 구황작물이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가뭄, 홍수 등으로 작물이 망가지면 메밀을 대파(代播)했다. 60~90일 정도 자라면 수확이 가능하니 고마운 식물이었다. 한편으로 메밀은 일상적이었다. 국수, 묵으로 만들었다. 메밀은, 구황작물이면서 일상적인 식재료였다.
 

음식은 고분(古墳)에서 찾아낸 유물이 아니다.
‘음식디미방’의 국수는 복원의 대상이 아니다.
복원해도 소용없다. 맛없다.
이제는 먹기 힘들다. 차라리 오늘날의 국수가 낫다.

◇ 메밀은 일상의 식재료였다

옥담 이응희(1579~1651년)는 왕족의 후예로 경기도 안산 수리산 언저리에서 전원생활을 했다. 옥담은 자신이 본 당시의 식재료, 음식, 전원생활을 ‘옥담사집’에 남겼다. 메밀에 대한 시다.

‘옥담사집’_만물편_곡물류/메밀[木麥]

칠월 초순에 밭 갈고 파종해/곡물 중 가장 늦게 수확하지/옥 같은 꽃은 이슬 머금고 피어나/검은 열매는 서리 맞고 단단해라/국수를 만들려면 희게 빻아야 하고/만두를 삶으려면 천 번을 두드린다/그 껍질은 어디에 쓰이는가/잘 갈무리해 두어 흉년에 대비해야지

음력 칠월 초순이면 양력 8월이다. 이때 파종을 하더라도 서리 맞고 늦게까지 자란다. 농가에서는 고마운 작물이다. 메밀로 국수도 만들고 만두도 만든다. 옥담은 16-17세기를 살았던 이다. 이때도 여전히 만두, 국수의 주 재료는 메밀이었다. 메밀껍질까지 갈무리했던 고단한 시절의 국수다.

김창업(1658~1721년)은 숙종 38년(1712년) 중국사신단으로 북경에 갔다. 그는 ‘노가재연행록’을 남겼다. ‘연행일기_노가재연행록’ 중 12월12일의 기사다.

손반죽과 기계반죽을 거쳐 기계로 뽑아낸 국수다. 4㎜ 국수.
손반죽과 기계반죽을 거쳐 기계로 뽑아낸 국수다. 4㎜ 국수.

시장에서 파는 국수가 좋다기에 주방을 시켜 사 오게 하였더니, 가늘고 길게 이어진 것이다. 이곳 국수는 모두 밀가루[小麥粉]로 만들며 그 맛이 메밀[蕎麥]국수보다 훨씬 좋았다.

중국에서는 이미 밀가루 국수를 먹고 있었다. 조선에서는 메밀국수다. 밀가루 국수가 얼마나 맛있으면 점잖은 선비가 “훨씬 좋았다[殊勝·수승]”라고 했을까? 그것도 대단한 곳에서 접대 받은 것도 아니고 시장에서 널리 파는 것이다. 국수가 가늘고 길게 이어졌다고 했다. 예나 지금이나 메밀로 만든 국수는 두텁고 툭툭 끊어지며 짧다.

메밀은 국수 만들기 힘든 작물이다. 지금도 메밀 100% 국수가 불가능하다고 믿는 이가 많다. 기계가 발전하고 고운 가루를 얻었다. 메밀 100% 국수도 가능하다. 시중의 상당수 국수는 예전 방식을 따른다. 메밀가루에 강력분 밀가루를 섞거나 전분을 섞는다.

전분 섞어서 만든 메밀국수는 ‘음식디미방’의 국수와 비슷하다. 메밀에 강력분이나 전분을 섞은 국수. ‘음식디미방’ 국수와 비슷하다고 해서 전통적인 국수일까? 그렇지는 않다.

메밀, 전분이 모두 귀하고 한편으로 만드는 공력이 많이 들던 시절이다. 국수는 여전히 귀했다. 만들기 힘들었으니 더더욱 귀했다.

여성위 송인(礪城尉 宋寅·1517~1584년)은 중종의 부마(사위)다. 송인의 아버지 송지한은 철원부사였다. 송인이 결혼 10년 차쯤 되었을 때다. 중종 34년(1539년) 10월8일의 ‘조선왕조실록’ 기사다. 제목은 “유지를 내릴 때 국수와 떡 같은 음식을 내지 못하게 하다”이다. ‘유지(有旨)’는 임금의 명령이다.

갓 제분한 국내산 밀가루.
갓 제분한 국내산 밀가루.

“여성위 송인이 근친(覲親)을 하기 위해 강원도로 내려갔는데, 감사 정순붕이 식물(食物)을 제급(題給)할 때 국수와 떡은 지급해서는 안 된다. 이런 것은 모두 백성들의 피땀에서 나온 것이니, 유지(有旨)를 내릴 때 이런 식물은 지급하지 말라는 일도 아울러 하유하라”

여성위 송인은 국왕의 사위로, 학문도 깊었고 벼슬길도 탄탄대로였다. 여성위가 장인 중종에게 밉보인 일도 없었다. 그런데 기사의 내용과 같은 ‘국왕 명령’이 있었다. 사위가 아버지, 국왕의 사돈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사돈의 벼슬도 제법 높다. 철원부사다.

국왕이 철원부사의 상급자인 강원도 감사에게 내린 명령이 “음식물을 내놓을 때 국수와 떡은 주지마라”는 것이다. 이유도 설명했다. 이런 음식들은 백성의 피땀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만들기 힘드니 민폐 끼치지 마라는 것이다.

‘지응(支應)’ 공식적이며 합법적인 일이다. 관리들이 타 지역에 가면 현지 관청에서 음식, 필요한 물품을 조달했다. 부마의 공식적인 행사임에도 ‘민폐 끼칠까 두려워’ 국수와 떡은 제한했다. 그것도 국왕의 명령으로. 메밀국수는 귀했고, 공력이 많이 드는 음식이었다.

기계면이다. 기계면은 압면(壓麵)이고, 칼국수는 칼 등으로 자르는 삭면(削麵)이다.
기계면이다. 기계면은 압면(壓麵)이고, 칼국수는 칼 등으로 자르는 삭면(削麵)이다.

◇ 미공법 480조가 한반도의 국수를 바꿨다

이병철의 ‘삼성상회’ 국수는 내수용이었다.

상당수는 안동, 봉화 등의 도매상을 통하여 경북 북부로 팔려나갔다. 1930년대 후반의 기계로 국수를 만들었다. 밀가루다. 일제는 만주에서 중국산 밀을 가져왔다. 경부선 철도로 구포항까지 옮긴 후 일본으로 가져갔다. ‘삼성상회’도 만주 등에서 밀을 가져온 다음 대구에서 제분, 제면했다. 이 국수가 안동, 봉화 등지로 팔려나간 것이다.

‘삼성상회’의 국수가 경북 지역에서 환영받은 이유가 있다. 밀가루로 만든 국수는 ‘건진국시’가 가능하다. 메밀은 쉬 풀어지니 ‘건진국시’가 불가능하지만 밀가루 국수는 가능하다. 국수 만드는 품도 과하지 않다.

오늘날 ‘안동국시’는 ‘건진국시’를 뜻하지만 역사는 불과 100년 정도다. ‘음식디미방’의 국수는 대부분 메밀국수다. 밀가루, 전분 국수도 있지만 메밀국수가 대세다. 건진국시는 불가능하다. 건진국시는, 전통이나 전통이 아니다.

한반도의 국수 문화를 획기적으로 발전시킨 것은 엉뚱하게도 미국의 법률이다. 미공법 480조(PL 480=Public Law 480). 1950년대를 전후하여 미국에서는 밀이 대량, 잉여 생산되었다. 한국전쟁을 치르면서 미국은 “공산주의 확대를 막는 것은 무기와 더불어 풍부한 식량”이라고 믿었다.

1950년대 중반, 미국 산 밀이 한반도로 밀려들어왔다. 박정희 정권은 흔해진 밀가루를 전후 재건사업에 사용했다. 산비탈을 개간하면 밀가루를 줬다. 도시 정비사업에도 밀가루가 동원되었다. 가정의 칼국수와 영세공장의 기계국수 모두 흔해졌다. 김창업이 1712년 북경에서 만났던 ‘가늘고 긴 국수’가 지천으로 나타났다.

YS는 국수 마니아였다.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서울 성북과 압구정동의 안동 ‘국시집’을 다녔다.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YS의 국수 사랑은 여전했다.

국수를 기름에 튀긴 것. 예전에는 만들기 불가능했던 것이다.
국수를 기름에 튀긴 것. 예전에는 만들기 불가능했던 것이다.

YS는 ‘국시’와 국수를 혼동했다. 안동 스타일의 ‘국시’를 먹으면서 국수라고 불렀다. 대부분의 국민들도 마찬가지. ‘국시’와 칼국수를 가르지 않았다. YS 덕분에 국수는 유명해졌지만, ‘콩가루를 쪼매 넣은 안동국시’의 정체성은 애매해졌다. 어느 게 전통적인지는 얼마간의 세월이 지나야 가려질 것이다.

목포에서는 ‘홍어 없는 제사 없다’고 한다. 영남에서는 ‘국수 없는 잔치 없다’다.

국수 만드는 과정은 눈물겨웠다. 갓 수확한 메밀에는 돌이 섞여 있다. 돌을 일일이 가려낸 후, 메밀을 깨끗하게 씻는다. 흙이 묻어 있다.

통 메밀을 맷돌에 넣고 부순다. 깨진 메밀을 절구나 디딜방아에 넣고 찧는다. 체로 치면 고운 가루는 아래로 빠진다. 거친 메밀과 무거리(나머지 찌꺼기)를 다시 맷돌에 갈고 절구에 찧는다. 이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한다. 고운체를 통과한 가루만 모아서 국수를 빚는다.

우리 밀로 제분한 밀가루로 잔치국수, 라면, 칼국수를 차렸다.
우리 밀로 제분한 밀가루로 잔치국수, 라면, 칼국수를 차렸다.

병풍을 친 방 안에서 맷돌, 절구로 갈아낸 것을 부채로 부친다. 가벼운 가루는 멀리 날아가고 무거운 것은 가까운 곳에 떨어진다. 가까운 곳에 떨어진 것을 모아서 다시 맷돌, 절구에 넣는다. 이 과정을 반복하여 고운 가루를 얻었다.

1960년대 밀가루가 흔해지면서 메밀국수는 사라졌다. 칼국수를 만들거나 공장에서 생산된 고운 국수를 구했다.

‘봉제사접빈객’. 제사 국수는 사라졌지만 손님맞이 국수는 여전히 남았다. 오늘날도 남아 있는 ‘잔치국수’, 시장의 ‘장터국수’ 등이다. 누구 잔치인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리는 식당에서 잔치국수를 사먹는다. 시장에는 상인과 손님들이 많다. 모두 식당에 가서 장터국수를 사먹는다. ‘접빈객’의 ‘객’은 시장 상인들, 시장 손님들이다.

전통. 되살려야 한다. 국수는 끊임없이 변화, 발전한다. 무엇이 전통인가? 무엇을 살릴 것인가?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저작권자 © 경북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