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종<br>​​​​​​​경북대 교수·노문학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

오래 전에 읽은 책을 다시 만나는 것은 가슴 설레는 일이다. 그때 무슨 생각을 하며 책을 읽었는지, 기억에 남는 것은 있는지, 왜 하필이면 그 책을 읽었는지. 여러 가지 소회가 찾아들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옛사랑이나 까맣게 잊힌 친구와 재회하는 일과는 결이 다른 감정과 추억이 찾아드는 것이다. 더러는 책갈피의 색 바랜 흑백사진이나 잘 마른 낙엽 혹은 행간에 적어 넣은 단상이 젊은 날을 반추하도록 인도한다.

연말부터 프랑스 문학을 읽고 있다. 기존에 읽은 위고의 ‘레미제라블’과 위스망스의 ‘거꾸로’, 보마르셰의 ‘세비야의 이발사’와 ‘피가로의 결혼’, 몰리에르의 ‘타르튀프’와 ‘서민귀족’에 카뮈의 ‘페스트와 졸라의 ‘목로주점’을 덧댔다. 프랑스 작가는 아니지만 프랑스 대혁명의 소용돌이를 배경으로 한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여기에 이케타 리요코의 만화 ‘베르사유의 장미’와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가 추가되었다.

이번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순정만화 ‘베르사유의 장미’는 슈테판 츠바이크의 소설 ‘마리 앙투아네트’를 원작으로 삼았다고 한다. 당연히 그것도 독서목록에 더할 요량이다.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프랑스 대혁명을 전후로 한 시점에 등장하는 인간군상과 그들이 마주했던 시공간과 사건이다. 혁명전후 100여 년 프랑스와 유럽을 뒤흔들었던 전변(轉變)의 인물들은 어떤 세상과 인생을 꿈꾸었는지가 궁금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페스트’와 ‘어린왕자’는 한 발 비켜서 있다. 특히 ‘어린왕자’가 그러하다. 거대한 역사적 사변과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강력한 심장의 고동에 거리를 두고 관조하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언제나 혁명과 사건과 투쟁과 갈등을 당연한 전제로 살아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전쟁 중에도 아이는 태어나고, 사랑과 이별이 있으며, 지진과 해일이 덮치는 와중에도 장미는 피어나기 때문이다.

약관 스무 살 무렵 내가 아침저녁으로 들고 다닌 서책은 ‘어린 왕자’와 ‘윤동주 평전’이었다. 프랑스어를 배우지 않아서 영어로 된 ‘어린왕자’와 윤동주 시인의 일대기를 담은 ‘윤동주 평전’이었다. 기실 학부시절에 나는 그다지 성실한 학생이 아니었다. ‘한잔의 좋은 술, 한편의 좋은 영화, 한판의 좋은 바둑’이 있으면 자발적으로 휴강했다. 그럼에도 윤동주, 서정주, 김소월, 김수영 같은 시인들의 작품은 줄기차게 읽고 생각했다.

‘어린왕자’는 읽다가 덮고, 감동하고 다시 읽고 심호흡하며 느끼곤 했다. 그러다 마음에 다가오는 친구나 여성이 있으면 군말 없이 선물했다. “한번 읽어보세요!” 하는 말과 함께. 그런 서책을 수십 년 세월이 지난 다음에 다시 읽노라니 옛 생각이 스멀스멀 찾아온다. 지금도 기억에 선연한 것은 여우가 말한 ‘길들인다는 것’의 함의다. 관계를 맺는다는 말로 길들인다는 것의 의미를 설파하는 여우. 왕자는 별에 두고 온, 여리지만 자만심 강한 장미를 떠올린다.

선로 변경원의 말처럼 ‘자신이 있는 곳에 만족하지 못한’ 어린왕자가 황량하고 삭막한 지구에 와서 여우의 도움으로 깨닫게 된 삶의 진리는 길들인다는 것이었다. 여우는 말한다.

“우리는 자신이 길들인 것만 진정으로 알 수 있어. 너의 장미가 중요한 존재가 된 것은 네가 장미에게 들인 시간 때문이야. 네가 길들인 대상에 대해 넌 영원히 책임져야 해.”

‘어린왕자’를 읽은 다음 까마득한 시간이 흘렀다. 그럼에도 ‘길들인다는 것’의 묵직한 함의는 아직도 남아있는 듯하다. 그래서 동주의 ‘서시’를 좋아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린왕자와 그가 길들였던 장미가 깊은 밤 B612호에서 환하게 빛나는 하늘을 우러르는 버릇도 그 시절 생겨났는지도 모른다. 이젠 ‘어린왕자’와 ‘동주평전’을 전할 사람 하나 없으매, 그것이 못내 아쉬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