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수 현

낮아지는 햇살 틈새

마지막 이파리 몇 장 우리를 떠날 때

저만치 늦은 가을 강을 건너는 널 보았지

자욱히 억새꽃 날리어가는 언덕길

바람 속 하얀 발자욱 두고

온 저녁이 있었어

침묵 속으로

짙은 안개가 내리고

바람은 속절없이 불어

가슴 속 고운 무늬들을 지워갔지만

찌그러진 연밥 위로 기억들은 발효되고

고요히 푸른 여운이 숨 쉬고 있었어

굴절된 시간의 매듭을 풀며 가만히

나를 두고 떠나는 십이월

차가운 강에도

두고 온 억새언덕 발자욱 위에도

눈이 치겠지

아슴아슴 떠오르는

그리운 순간들 위로도

하얗게

하얗게 눈은 내리겠지

억새꽃 하얗게 날리는 늦가을 언덕에서 지난 날 청춘의 시간 속에 두고온 사랑을, 혹은 아름다운 추억을 떠올리고 있다. 어쩌겠는가, 붙잡을 수 없는 시간은 핑핑 지나가는데. 바람은 속절없이 불고 길고 푸른 여운을 남기며 떠나는 가을의 끝자락에 서서 곧 하얗게 눈이 내릴 걸 생각하며 상념에 들고 있음을 본다. 아득히 멀어져 가는 것들을 나직이 호명하며 그리움에 젖어듦을 본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