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한동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해이다. 1919년 3월 1일 일제 강점 하에서 서울에서는 33인이 독립을 선언하고, 대구에서도 3월 8일 서문시장 부근에서 만세 운동을 시작했다. 이어 전국 방방곡곡의 만세운동은 연 참여인원이 100만 명을 넘었다. 대한광복회는 3·1 운동 발발 4년 전인 1915년 8월 대구 달성공원에서 항일운동 조직으로 창설됐다. 일전에 찾아간 대구 달성공원에는 이곳에서 대한 광복회가 창설되었다는 표지판 하나 없었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고 나라의 광복을 위해 대구에서 창설된 이 단체를 아는 사람도 별로 없다. 3·1 운동의 모태인 광복회의 결성 장소가 달성공원임을 아는 사람은 더더욱 없다.

일제 시 달성공원에는 일제가 천황폐하를 위해 절을 하도록 세운 요배(遙拜)대가 있었고 일제의 대표적인 신사(神社)도 이곳에 마련되었다. 일제가 식민통치를 위해 신성시했던 이곳에 광복회가 설립한 것은 매우 기이한 일이다. 이 단체를 주도한 선열들의 일제에 대한 강한 저항정신이 이곳을 창립 장소로 선정했음직하다. 대구의 달성공원에서 1915년 8월 25일(음력 7월 15일 ) 창립된 대한광복회는 영주 풍기에서 1914년 11월 결성된 광복단과 대구의 조선국권회복단을 통합해 설립된 항일운동 단체이다.

비밀 결사 조직인 대한광복회는 이 조직의 중심에 울산 출신 박상진 총사령이 있었다. 그는 서울 양정서숙에서 경제학과 법률학을 공부한 엘리트이며 1910년 어려운 법관 시험에 합격했다. 평양 판사 발령이 났으나 일제하의 벼슬을 초개처럼 버리고 무장 독립단체의 선봉장이 됐다. 당시 광복회는 우재룡을 지휘장으로 하는 중앙조직을 갖추고 조선 8도 지부를 결성했다. 1915년 12월에는 만주 길림 광복지회(지회장 김좌진)까지 설립해 항일 독립운동의 기세를 확장했다. 이들 단체는 일제의 삼엄한 감시에도 굴하지 않고 전국적 조직망을 완비하고,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해 후일 3·1 운동과 상해 임정의 발판이 됐다.

광복회는 독립 운동가들의 자금을 마련해 지원하고 국권 회복을 위한 군사 무장 조직까지 갖춰 일제에 강력히 저항하는 조직이 됐다. 이들은 조국의 광복을 위해 만주에 군 간부를 양성하기 위한 무관학교 설립 등 군사계획까지 수립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들 조직원들은 국내의 의연금 등 모금운동을 전개했으나 성과가 부진하자 곡물상회 등을 운영하면서 자금조달에 힘썼다. 이 상회는 광복회의 비밀회의 장소가 되고 군자금 모금의 창구 역할을 겸했다. 이들은 일제의 수탈과 가혹한 감시 하에서도 일제가 징수한 세금을 수송하는 우편마차를 습격해 독립자금을 마련하기도 했다. 당시 우재룡 지사가 주도한 경주 우편 마차 탈취사건, 영월 중석광산과 운산 금광 습격사건이 대표적 사건이다. 한편 광복회는 관찰사를 지낸 친일 부호 장승원 등을 과감히 처형하는 등 의혈(義血)활동도 동시에 전개했다.

대구 달성공원에서 창립된 광복회는 후일 이 나라 독립운동의 노둣돌이 됐음은 익히 알려져 있다. 광복회의 비밀 결사 항쟁 정신은 후일 독립지사들의 의혈투쟁으로 연결됐다. 이러한 항쟁 정신이 상해 홍구공원의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나타난 것이다. 이들 조직을 결성한 박상진 의사는 1926년 8월 11일 대구 형무소에서 순국하고, 채기중 등 여러 명의 애국지사들도 서대문 형무소에서 생을 마감했다. 당시 군자금을 모금을 하다 체포된 우재룡 지사는 두 번에 걸쳐 18년의 형기를 치렀다. 이처럼 대구는 이 나라 항일 투쟁의 본거지였음을 부정할 수 없다. 광복회가 창설되고 3·8만세운동의 유물과 유적이 곳곳에 남아있는 이곳 시민들은 달성공원이라도 찾아 선혈들의 의로운 뜻을 되새겨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