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별아의 월성을 걷는 시간
③ 문헌 속의 월성 - ‘삼국유사’와 ‘화랑세기’

동궁과 월지 방향의 월성 입구 인근에 조성된 해자와 월성의 모습. 1984년부터 월성 해자에 대한 시굴조사가 시작되어 해자의 대략적인 규모 및 성격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해자란 성벽 외곽에 땅을 파서 인공으로 고랑을 내거나 자연하천을 이용하여 외부침입을 차단하는 성곽 시설이다. /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육당 최남선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서슴지 않고 후자를 택할 것이라고 했다. 시인이자 연구자인 고운기는 ‘삼국유사’를 한마디로 ‘길 위의 책’이라고 했다. 사가(史家)들보다는 작가들이 사랑한 책, ‘삼국사기’의 사(史)와 달리 일 혹은 이야기라는 뜻의 사(事)를 쓰는 ‘삼국유사’에는 ‘월성(月城)’이라는 단어가 8회 등장한다.
 

연오랑·세오녀의 비단 간직한 ‘귀비고’

국보 ‘만파식적’ 간직한 나라창고 ‘천존고’
일곱 길의 물이 솟아났다는 ‘금광정’ 등
삼국유사 속에서 여덟 차례나 등장
귀신의 자식 ‘비형랑’의 기행도 담아

화랑도 우두머리 풍월주 계보 풀어낸
‘화랑세기’에선 궁주·대궁 등으로 표현

또한 해와 달이 된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가 신라의 어둠을 걷어내라고 보내준 비단 국보를 간직한 창고 귀비고(貴妃庫)와, 문무왕과 김유신의 영혼이 후대를 위해 보낸 대나무로 만든 국보 만파식적을 간직한 나라 창고 천존고(天尊庫)의 존재도 ‘삼국유사’를 통해 확인된다.

궁녀들이 출입하는 궁성 서쪽 귀정문(歸正門)은 경덕왕이 누각에서 차를 마시며 충담사가 지어 바친 노래 ‘안민가’를 들었던 곳이고, 천존고에 보관한 만파식적을 일본 왕이 보여 달라고 자꾸 조르니 그 흉심이 걱정된 듯 옮겨 간직한 내황전(內黃殿)도 월성의 일부이다.

경덕왕 때 궁 안의 우물이 마를 정도로 가뭄이 심하기에 대현법사가 ‘금광경(金光經)’을 강론하며 단비를 빌자 일곱 길이나 되는 물이 솟아났다는 금광정(金光井)은 월성의 보배로운 우물이었을 것이다.

혜공왕 때 혜성이거나 별똥별이었을 천구(天狗)가 떨어진 동루(東樓), 뜰 안에 별 세 개가 떨어져 땅 속으로 들어갔다는 북궁(北宮), 헌강왕이 잔치를 할 때 지신(地神)이 나와서 춤을 추었다는 동례전(同禮殿)도 등장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대한 비교는 학교 시험 문제로 나올 정도로 차고 넘친다. ‘삼국사기’의 편찬자인 김부식과 ‘삼국유사’를 편찬한 일연에 대한 비교도 하고많다. ‘삼국사기’가 기전체의 관찬(官撰) 사서라면 ‘삼국유사’는 기사본말체의 사찬(私撰) 사서, 김부식이 유학자라면 일연은 불교의 승려 등등.

150년의 간극을 두고 쓰인 두 권의 책을 시시콜콜 비교하는 것이 얼마나 의미 있고 중요한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김부식과 일연이 역사와 시간, 그리고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랐다는 것은 확실하다.

대저 사람들은 자기가 아는 만큼 볼뿐더러 관심 만큼 느낀다. 그 관심이란 결국 자신의 처지와 이해요구에서 비롯될지니, 22살에 관계에 진출해 이자겸과 묘청의 난을 물리치고 승승장구한 정치가 김부식과, 9살에 출가해 국사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나 세속의 인연을 완전히 끊지 못하고 나병을 앓는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고향 경주로 돌아온 일연이 어찌 같은 눈길로 세계를 볼 수 있을까?

그럼에도 1142~1145년, 1277~1281년으로 추정되는 각각의 집필 시기에 김부식과 일연의 나이는 공통적으로 70대 어림이었다. 공자는 70세를 종심(從心)이라 부르니,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좇아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 시기다. 김부식도 일연도 혼란 세상을 종횡하며 혜견(慧見)과 입관(入觀)의 경지에 이르렀을 터, 참으로 역사를 쓰기에 좋은 때였으리라.

‘삼국사기’ 속의 월성이 신라 왕정의 중심이었다면, ‘삼국유사’ 속의 월성은 신라 사람들이 세오녀가 짠 고운 비단처럼 펼치는 꿈과 소망의 무대이다. ‘삼국사기’에서 짐짓 엄격히 다루는 신비와 이적(異蹟)도 ‘삼국유사’에서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 된다. 왕들은 알에서 태어나고, 용이 뱀보다 더 자주 출몰하며, 귀신들은 수시로 인간과 통한다.

과학적 합리주의에 익숙한 현대인에게는 고대의 판타지가 황당해 보일 수 있다. 좋은 판타지는 거대하고 치밀한 상징이라 빽빽한 나무들에 둘러싸인 채 숲을 보기는 쉽지 않다.

단군신화가 천신을 믿는 환웅족과 곰 토템사상을 지닌 웅족의 결합을 상징하는 ‘종족 통합 신화’였다거나, 난생신화는 건국시조에게 초인적인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만들어진 탄생설이라는 해석으로 근거를 찾기도 한다. 하지만 친절한 과학적 설명 이전에 신비를 그저 신비로 상상하며 느껴 보는 건 어떨까? 아주 위험하거나 너무 불편하지 않다면 말이다.

왕이 비형랑을 불러 묻기를 “네가 귀신을 거느리고 논다는 말이 사실이냐?”하자 비형랑이 대답하길 “그렇습니다.”하였다. 왕이 “그러하면 너는 귀신의 무리를 이끌고 신원사의 북쪽 도랑에 다리를 놓아 보도록 하여라.”하였다. 비형은 칙명을 받들고 그 무리들로 하여금 돌을 다듬어 하룻밤사이에 큰 다리를 놓았다. 그런 까닭에 귀교(鬼橋)라 한다.

비형랑은 ‘삼국사기’에 없는 인물로 ‘삼국유사’ 기이편에 그야말로 기이하게 등장한다. 그의 아버지는 진지왕(의 영혼), 어머니는 도화녀다.

진흥왕의 둘째 아들인 진지왕은 4년을 재위하고 물러나는데, ‘삼국사기’에는 폐위의 원인이 나타나지 않고 ‘삼국유사’에는 ‘정치가 문란하고 주색에 빠져 음탕하므로 나라 사람들이 임금 자리에서 몰아냈다’고 나온다. 폐위된 진지왕은 2년 후 죽고, 그 영혼이 과부가 된 도화녀 앞에 나타나 생전에 유부녀라서 포기했던 회포를 풀고 비형을 낳았다는데….

일단은 신비를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따라가 본다. 아이는 귀신의 자식이다. 아버지가 왕(의 영혼)이었다지만 고아나 다름없으니 궁궐에 살아도 감옥이나 매한가지다. 그는 월성의 담을 뛰어넘어 어둠을 뚫고 달려가 엇비슷한 처지의 귀신들을 만난다.

사람이 아닌 귀신이니 하룻밤사이 큰 다리를 놓으라는 얼토당토않은 칙명도 거뜬히 수행한다. 이러쿵저러쿵하여 후일 비형랑은 민간에서 귀신을 쫓는 벽사의 신통력을 가진 존재로 여겨진다.

졸작 ‘미실’에도 비형랑이 등장한다. 드라마의 주인공이 가진 출생의 비밀도 밝혀진다. 그 비밀의 문을 여는 열쇠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현존하는 사서의 전부인 듯했던 고대사에 뒤늦게 등장한 문제작, ‘화랑세기’다.

고운기의 ‘삼국유사 글쓰기 감각’ 목차는 ‘이야기꾼 일연’, ‘시대의 충실한 일꾼 김부식’, 그리고 ‘또 한 사람 김대문’이다. 바로 그 김대문이 자신의 조상을 포함한 화랑도의 우두머리인 풍월주들의 계보를 풀어쓴 책이 ‘화랑세기’인 것이다.

1989년 경남 김해에서 발견된 ‘화랑세기’ 필사본이 704년 김대문이 저술한 ‘화랑세기’와 동일한 것인지는 여전히 확실치 않다. 재야사학자 박창화가 일제강점기에 베껴 썼다는 ‘화랑세기’ 필사본에 대한 진위논쟁이 한소끔 달아올랐다 지금은 지지부진하지만, 새로운 금석문과 획기적인 고고학적 성과가 아니라면 앞으로도 ‘진짜파’와 ‘가짜파’ 사이의 접점을 찾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

그럼에도 흥미로울 수밖에 없는 점은 ‘삼국사기’의 역사와 ‘삼국유사’의 신비가 ‘화랑세기’ 필사본의 이야기를 통해 더욱 선명해진다는 사실이다. ‘화랑세기’ 필사본에서 진지왕은 미실과의 약속을 어기고 독주하다 폐위되어 유폐된다. 물론 백성들은 왕이 산 채로 갇혀있다는 것을 모르고 죽은 줄만 알았을 것이다.

이때 폐위된 진지왕이 과부가 된 도화녀와 재회하여 낳은 아이가 비형랑이고, 비형랑은 화랑이지만 신분의 제약으로 풍월주가 되지 못한 채 자기와 비슷한 처지의 무리와 어울린다. 하루아침에 다리를 놓을 만큼 능력이 출중했던 비형랑과 그의 친구들, 그들을 귀신으로밖에 치부하지 않았던 신분제 사회의 모순이 설핏 드러난 이야기가 아닌가? 결국엔 비형랑 김용춘의 아들 김춘추가 왕좌에 오르니, 성골에서 진골로 헤게모니가 넘어가는 데는 귀신의 힘만큼이나 절묘한 비방이 필요했으리라.

‘화랑세기’ 필사본에는 ‘월성(月城)’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궁주(宮主)들과 대궁(大宮)이라는 표현으로 존재가 드러난다. ‘화랑세기’ 필사본 속의 월성은 신국(神國)에만 존재하는 ‘신국의 도(道)’가 현현하는 사랑과 삶의 터전이다.

후세의 기준으로는 음란하고 방종해 보일지 모르나 그들은 자연의 일부분으로서 욕망에 솔직하며 다만 자기의 시대를 힘껏 살아낸 것일지도 모른다.

기존의 ‘화랑세기’ 필사본 진위논쟁에서 ‘진짜파’가 내놓은 증거 중 하나는 월성과 관계가 깊다. 5세 사다함 편의 한 대목이다.

금진낭주는 평소에 색에 빠졌다. 많이…. 무관랑을 몰래 들였다. 무관랑은 사다함을 대하기가 어려웠는데…. (사다함이)… 위로하여 말하기를 “네가 아니라, 어머니 탓이다. 나와 더불어…. …벗으로 어찌 작은 혐의를 문제삼겠는가” 하였다. 금진이 듣게 되어…. …스스로 도리를 알았다. 나에게 너그러운 것은 곧… 무관랑…. (사다함이) 함께 출입하였다. 낭도들 중에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무관랑은 도망하고자 하여 …밤에 궁의 담(宮墻)을 넘다가 구지(溝池)에 떨어져 다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금진낭주는 5세 풍월주 사다함의 어머니다. 사다함의 부관인 무관랑은 금진의 유혹에 빠져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으나 상관이자 벗을 속이는 죄책감 때문에 괴로워하다가 마침내 도망쳐 관계를 끊고자 한다. 한데 얻어먹을 것도 옆집 노랑강아지 때문에 못 얻어먹는다던가? 하필 결정적인 개심의 순간 월성의 궁장을 넘다가 실족하여 구지에 떨어져 죽고 만다.

그런데 1984년 이전에는 월성 주변에 해자가 있었던 사실을 알 수가 없었고, 신라인들이 해자를 구지라고 불렀다는 사실도 뒤늦게 확인되었다. 1962년에 죽은 박창화가 어찌 이런 비밀을 모두 알고 ‘소설’을 썼단 말인가?

무관랑이 떨어진 구지에 대한 기록이 ‘화랑세기’ 필사본의 신빙성을 확인해 주는 하나의 근거가 된다(이종욱.1997)는 것이 ‘진짜파’의 주장이다.

주류 사학계의 저울이 위작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고 할지라도 ‘화랑세기’ 필사본 발견 이후의 신라 연구는 그에 빚진 부분이 아주 없지 않다.

한반도에 존재했던 왕조들을 통틀어 신라에만 여왕의 존재가 가능했던 배경이라든가, 14수만 달랑 남았다고 알려진 향가에 새로운 향가가 더해질 가능성이라든가 하는 것이 연구에 활력을 더하는 셈이다. 앞으로 월성의 발굴이 본격화되면 더 많은 쟁점들이 밝혀지고 새로이 충돌할 것임에 천년의 비밀 앞에서 가슴이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