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에는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생각해 볼 겨를도 없다.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는데, 뒤돌아 볼 짬 없이 앞으로만 내달리고 내달리며 한 6개월 이상을 버텨온 것 같다.

여섯 달이라고 했으니 생각해 보면 지난 해 6,7월 경이다. 방학이라고 했고 또 쉴 수도 있는 여유가 있었는데 그럴 계획이라고는 제대로 짜보지도 못했다.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랄까, 다른 사람들은 내가 워크홀릭이라고도 하지만 중독도 아닌 시달림에 하루하루 불안과 초조로 하루하루를 살았다.

일이라 해야 주로 글을 쓰는 것이고, 그것도 지난 해는 논문에 어느 만큼 집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에세이와 논문의 차이는 크다. 수필 같은 것, 심지어 평론 같은 것은 생각나는 대로 쓸 수 있고 생각의 흐름을 따라 자연스럽게 흘릴 수 있지만 논문은 그런 ‘장르’가 될 수 없다. 일정 시간을 들여 일정 분량만큼 자료를 소화하지 않고는 한 문장도 제대로 나갈 수 없는게 논문이다. 이 논문들이 지난 게으름 탓으로 줄을 이어 서 있을 때 앞이 그 장벽들 때문에 어떻게 해도 멀리 볼 수 없었다. 하나를 쓰면 또 하나, 그 다음에 또 하나. 논문 쓰느라 공부 못하겠다는 우스개 소리처럼 여섯 달이 그렇게 흘러간 것 같다.

며칠 전에도 어쩔 수 없이 일 때문에 도서관을 찾았다. 3·1운동에 관한 책들을 잔뜩 찾아 대출해야 했다. 말이 3·1운동이지 그 앞에는 2·8 유학생 독립운동도 있었고 둘 사이를 연결해 가며 김동인이니 이광수니 이돈화니 하는 글들을 찾아보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그렇게 도서관 순례를 하고 책을 열댓 권 겹쳐들고 도서관 통로를 나오다 보니 책이란 왜 그렇게 무거운지 팔이 끊어질 것 같다. 도서관 통로 바깥에 있는 벤치에 책들을 내려놓고 한숨을 쉬는 찰나, 바로 그때 겨울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아하. 겨울나무로구나. 벤취에 앉아 이파리 하나 묻히지 않은 고동색 겨울나무의 앙상한 줄기, 가지들을 쳐다보려니 감탄이 저절로 난다. 세상에 겨울에 아름다운 게 하고 많지만 저 겨울나무처럼 아름다운 게 또 있을까 싶다.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것처럼 호사스럽게 아름다운 게 있을까.

탈피로구나. 저렇게 벗어버리는 것이구나. 그러면 사람도 새롭게 태어날 수도 있겠구나. 한 생을 살아도 다생을 사는 것처럼 해마다 한 번은 벗어버리는 의식을 거행하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겠구나.

캠퍼스는 언덕 위에 있어 그쪽에 가만히 서 있는 겨울나무 뒤로는 올려보면 바로 하늘이다. 텅 빈 하늘을 배경 삼아 침묵 속에 고요히 서 있는 나무를 나 역시 말없이 바라보자니 마음 저절로 숙연해진다.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 내달려온 것일까. 논문이라는 일 속에서 과연 나는 나라는 존재를 얼마나 깊이 있게 들여다 볼 수 있었던 것일까.

저 겨울나무는 그런데 사실은 내가 하루에도 한 번씩은 꼭꼭 바라보며 지나친 나무였건만.

오늘은 이 나무가 그렇게 달라보일 수 없다. 벌써 일 월도 보름이나 지났다. 빨리 이 무거운 일들을 벗어버리고 할 일이 아무 것도 없는 사람으로 이 벤취에 멍하니 앉아 있고 싶다. 저 옷 벗은 나무처럼 지난 날들은 어떻게 살았으며 앞으로는 무엇을 해야 할 지 생각해 보고 싶다.

책을 쌓아들고 일어서는 일을 잊고 나는 겨울나무가 내게 말이라도 걸어올 것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처럼 오래 그렇게 앉아 있었다.

세상에 겨울나무처럼 아름다운 것은 없었다. 그는 이 겨울 저녁 상념에 잠겨 있었다.

/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