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나리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1503년부터 1506년까지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신비한 그림은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데 이 그림을 보기 위해 찾는 관람객은 연간 800만 명을 육박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그림을 무료로 관람할 수 있는 날에는 6만5천 명이 몰린다고 하니 그야말로 이 그림 하나가 루브르 박물관을 먹여 살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나리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1503년부터 1506년까지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신비한 그림은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데 이 그림을 보기 위해 찾는 관람객은 연간 800만 명을 육박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그림을 무료로 관람할 수 있는 날에는 6만5천 명이 몰린다고 하니 그야말로 이 그림 하나가 루브르 박물관을 먹여 살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술 복제의 시대

사진의 초창기에 ‘라이프치히 시보(市報)’는 이렇게 썼다.

“찰나적 영상을 고정해 보겠다는 것은 철저한 독일의 연구 결과가 말해주듯 불가능한 일일 뿐만 아니라 이러한 것을 해 보려는 소망부터가 이미 신을 모독하는 일이다. 인간은 신의 모습 그대로 창조되어진 것이고, 또 신의 모습은 어떠한 인간의 기계에 의해서도 고정시킬 수가 없는 것이다. 기껏해야 신의 경지에 이른 인간만이, 그것도 일체 기계의 도움을 받지 않고, 천상적 영감에 의해서 최고의 계시를 받는 순간 그의 천부적 재능의 높은 부름에 따라 신의 모습을 닮은 인간의 모습을 재현시킬 엄두를 감히 낼 수 있을까 말까 할 정도이다.”

이 신문은 기계를 통해 찰나적 영상을 고정하는 행위가 신을 모독하는 일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지금은 이러한 주장을 한다면 모두가 비웃을 것이다. 그런데 대상을 복사하는 기술인 점점 발전하고 있으며, 3D 프린터를 통해 3차원 복제도 가능해지게 되었다. 이러한 3D 프린터의 기술이 발전한다면, 인간의 치아는 물론 연골이나 내장기관의 복제도 가능해진다.

그렇다면 이런 것도 상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복제 기술이 너무도 완벽하여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모나리자’를 원자의 구조에 이르기까지 그대로 복제하여 원본과 물리적 차원에서 구분이 불가능하게 된다고 치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본이 복제물 이상의 가치를 가질 수 있을까?”

이러한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원본의 의미와 복제물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여기에서 나아가 우리는 창작하는 행위에 대해서 또 인문학에 대해서 깊이 있게 고찰해볼 수 있을 것이다.

△원본과 복제물

위의 물음에서 말하는 원본이란 창작물을 말한다. 창작물이 경이로운 이유는 그것이 최초이기 때문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모나리자를 그린 최초의 사람이다. 최초란 처음 시작되었으므로 그 최초를 되돌려 다시 시작할 수 없다. 마치 글자를 익힌 사람이 글자를 다시 배울 수 없고,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된 사람이 자전거 타는 법을 다시 배울 수 없다. 이처럼 최초란 되돌릴 수 없는 어떤 것이다. 자전거 타는 법을 배웠으므로 손을 놓고 자전거를 탈 수 있고, 자전거의 앞바퀴도 들 수 있다. 글자를 배웠으므로 책을 읽을 수 있고, 글자를 배웠으므로 글을 따라 쓸 수 있고, 나아가 시나 소설을 쓸 수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우지 않았다면 자전거의 앞바퀴를 들 수 없을 것이며 글을 배우지 않았다면, 글을 쓸 수 없을 것이다. 최초에 행해진 것은 이런 식으로 지속되며, 결코 최초가 없었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는 확고한 것으로 자리매김 된다.

이후의 모든 행위들 속에는 최초가 깃들어 있다. 최초라는 것, 이러한 최초로부터 우리는 다른 것들을 사유할 수 있고, 그 최초를 발전시킬 수 있고, 그 최초로부터 새로운 최초를 도출할 수 있다. 예컨대 ‘모나리자’에 수염을 그려 넣은 것은 뒤샹이 최초다. 당연한 말이지만 다빈치의 ‘모나리자’가 없었다면 뒤샹의 최초는 없었을 것이다. 최초는 그 자리에서 고정되지 않고 새로운 최초의 실마리가 되며 확장되어 나아간다. 뒤샹이 ‘모나리자’에 그려 넣은 수염은 ‘모나리자’를 전복하는 행위다. 그런데 ‘모나리자’라는 원본이 없었다면 뒤샹의 전복도 불가능했을 것이므로 원본 속에 이미 전복과 자유의 가능성들이 배태되어 있다고 할 수도 있다.

이에 비해 복제품은 어떠할까. 벤야민은 원본은 일회적이지만, 지속적이며, 복제품은 일시적이지만 반복적이라고 말한다. 일회성이란 단 한 번밖에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나리자’는 그려졌으므로 더 이상 그려질 수 없고, 그렇게 그려진 것은 지속성을 갖는다. 최초란 이미 시작했으므로 다시 시작할 수 없다. 일시적인 것은 지속과 달리 잠깐 동안 이뤄진다. 일시적인 것을 지속시키는 방법은 반복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복제물은 원본을 아무리 따라한다 해도 이 최초가 가진 가치는 따라할 수 없다. 이것이 복제물이 가진 한계다.

복제물의 또 다른 한계는 똑같이 따라한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다양성이 사상된다. 똑같은 ‘모나리자’에 우리는 얼마든지 새로운 상상력을 보탤 수 있다. 앞에서 말한 뒤샹은 모나리자의 얼굴에 수염을 그려 넣었다면, 페르난도 보테르는 뚱뚱하게 모나리자를 그렸다. 그리하여 ‘모나리자’는 다빈치의 것으로 머물지 않고 새롭게 변형되고 변주된다. 그 변형과 변주 속에서 우리는 신선함을 느끼고, 어떤 해방감을 맛본다. 하지만 복제된 모나리자는 똑같다는 일시적 놀라움을 줄 뿐이다.

△창의성과 인문학

원본에는 최초가 담긴다. 그 최초의 다른 이름은 창의성일 것이다. 창의성은 새로운 것에 대한 추구이며, 새로운 것은 다양한 사고와 다양한 사고의 결합을 통해 도출된다. 그런 점에서 창의성의 핵심에는 다양성이 놓여있다. 이러한 창의성과 다양성은 인문학의 가장 중요한 속성이기도 한다.

자연과학은 자연과 자연현상을 학문의 대상으로 삼지만, 인문학은 인간과 인간으로 인해 촉발된 것을 대상으로 삼는다. 그래서 인문학은 인간과 인간의 창작물을 다루는 학문이다. 그런데 인간은 다양하다. 인간의 종도 다양하지만 인간의 생김도 다양하며 인간의 사고도 다양하다. 인문학을 배운다는 것은 곧 그런 다양성을 배운다는 뜻이다.

인문학은 다양한 인간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인간을 규정하지 않는다. 그 다양한 인간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것들, 한 번도 묻지 않은 것들에 의문을 던지게 된다. 그리하여 인문학은 묻는다. 왜 귀족과 평민은 차별받아야 하는가, 왜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하다고 생각되는가, 왜 흑인은 백인보다 열등하다고 생각되는가, 왜 우리는 장애인을 차별하는가,와 같은 생각들이 싹트게 된다. 그리하여 인문학은 아무도 묻지 않았던 것들에 물음을 던지고, 갇혀 있는 인식과 사고에 균열을 내고 전복한다.

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
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

이런 식으로 인문학은 끊임없이 새로운 도덕을 발견하고, 새로운 윤리를 창조한다. 인간은 발전되진 않더라도 적어도 확장된다. 그리하여 인문학은 최종적으로 말한다. 인간적인 것 가운데 나와 무관한 것은 없다고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인문학은 인간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다양한 인간들 속에서 인간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을 던진다. 다양하기 때문에 그 정체성은 쉽게 밝혀지지 않는다. 정체성은 존재하는 것으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유동하는 어떤 것이다. 곧 정체성을 찾는 과정 속에서 정체성이 형성된다. 그러므로 인문학은 사라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