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래수필가·시조시인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오늘은 특별하고 중요한 날이다. 무슨 특별한 행사나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가 아니다. 집안의 경조사가 있거나 가족의 기념일도 아니고 건강검진의 결과나 복권 추첨을 기다리는 날도 아니다. 하다못해 국경일이나 공휴일도 아니다. 그런데도 오늘이 특별하고 중요한 것은 바로 내 여생(餘生)의 첫날이기 때문이다.

죽을병이라도 걸려서 시한부 인생을 사는 게 아니라면 새삼스럽게 무슨 소리냐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 곰곰이 따져보면 남은 생의 첫날보다 더 소중하고 절실한 날도 없을 것 같다. 더구나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적게 남은 사람들일수록 그 첫날인 오늘이 어찌 사소하거나 예사로울 수 있겠는가.

오늘이 내 남은 삶의 첫날이라고 일상을 전혀 다르게 바꾸어야만 한다는 건 아니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여전히 땀 흘려 일해야 하는 하루임에는 변함이 없을지라도 그 일에 임하는 마음과 자세는 다를 수가 있는 것이다. 새해 첫날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헛된 꿈이나 악하고 추한 마음을 먹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내 여생의 첫날부터 사악한 일이나 나태와 방종으로 허송할 수는 없지 않는가. 오늘이 첫날인 만큼 모든 것이 새로운 일인 것이고, 비록 힘겹고 초라한 육체노동이라 할지라도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다행하고 보람 있는 일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널리 알려진 금언 중에 ‘메멘토 모리’란 말이 있다.‘죽음을 기억하라’는 라틴어이다.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임을 생각한다면 보다 겸허하고 진실한 삶이 될 거란 교훈이다. 오늘이 자기 생의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라는 말도 있다. 그러면 그 하루를 결코 허투루 살지는 못할 거라는 얘기다.

오늘이 내 생의 마지막 남은 하루라면 어떻게 함부로 허송을 할 수가 있겠는가. 오늘이 마지막 날인데도 전혀 예상을 하지 못하고 있다가 불의의 사고로 졸지에 아무런 준비도 없이 생을 마감해야 한다면 얼마나 억울하고 안타까운 일인가.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해서 매일 속옷을 갈아입는다는 사람도 있다지만 죽음에 대비한 마음의 준비도 삶을 보다 의미 있게 할 것이란 생각이다. 그렇지만 오늘이 내 생의 마지막 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보다는 남은 생의 첫날이라는 생각이 훨씬 더 긍정적이고 희망적이다. 달력에 있는 어느 날이든 남은 생의 첫날이 아닌 날이 없지만 사람들은 그 사실에 별로 괘념치 않고 사는 것 같다. 특별한 의미가 없이 주어지는 수많은 날 중의 하나로만 치부하기 일쑤다. 그래서 타성에 젖어 따분하고 무의미하게 보내거나 심지어는 탐욕에 몸을 맡겨 자신과 남을 해치는 일을 자행하는 짓도 서슴지 않는다.

마지막 날이라는 것보다는 첫날이라는 게 얼마나 희망적이고 가슴 설레는 일인가. 이미 지난 것에 연연하지 않고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산다는 것보다 바람직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아침에 잠자리에서 눈을 뜨면서 아, 오늘이 내 남은 생의 첫날이구나, 라고 생각하면 하루가 더없이 종요로워지고 뭔가 새로운 다짐으로 의미 있고 보람 있게 하루를 살고 싶어진다. 첫사랑, 첫 만남, 첫날밤처럼 ‘첫’이란 글자가 들어가는 말은 뭔가 신선하고 소중하고 설레고 떨리는 느낌을 준다.

하루를 맞이하는 처지와 기분은 사람마다 천차만별 다를 것이다. 그야말로 꿈인지 생신지 꼬집어볼 정도로 행복과 환희에 벅찬 사람도 있을 것이고, 차마 눈을 뜨고 싶지 않을 만큼 고통과 절망에 처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날마다 개미 쳇바퀴 돌 듯 지겹고 따분하게 반복되는 삶도 있을 것이고 하루하루가 너무나 아깝고 소중한 시한부 인생도 있을 것이다. 그 모두에게 행복하고 희망찬 하루가 될 수는 없을 것이지만, 그 누구든 여생의 첫날이라는 사실을 상기하는 것보다 더 바람직한 생각은 없지 않을까. 내 인생의 모든 하루가 다 개벽의 첫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