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삼관 매혈기’ 를 읽고

저 모퉁이를 돌면 다시 길이겠지만,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길은 길로 이어질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다른 무언가를 기대하며 저 모퉁이를 도는 일. 이것이 우리의 삶일 것이다. 수없는 모퉁이를 돌며 우리는 매번 길을 만나지만 매번 다른 꿈과 희망을 가지고 길을 걷는다. 그러므로 삶은 허무하지 않다.
저 모퉁이를 돌면 다시 길이겠지만,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길은 길로 이어질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다른 무언가를 기대하며 저 모퉁이를 도는 일. 이것이 우리의 삶일 것이다. 수없는 모퉁이를 돌며 우리는 매번 길을 만나지만 매번 다른 꿈과 희망을 가지고 길을 걷는다. 그러므로 삶은 허무하지 않다.

0.

위화는 중국의 소설가다. 그는 치과 의사라고 한다. 중국의 치과 의사는 우리나라와는 사정이 달라 이를 뽑지만 다른 직업과 마찬가지의 월급을 받는다. 그 일을 하는 동안 위화는 너무 고단하고 무료했다고 한다. 그런데 길 건너의 사무실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볼 때마다 모여 이를 드러내고 잡담을 하더라고. 그래서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저렇게 하루 종일 놀아도 되는 직업이 다 있나 하고 알아봤더니 그게 다름 아닌 소설가였다고 한다. 그래서 위화도 매일같이 사람들의 이를 보는 일 대신 이를 드러내고 말을 하는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특이한 이력의 이 소설가를 유명하게 베스트셀러로 만든 소설은 단연 ‘허삼관 매혈기’다.

1.

이 제목이 말해주듯, 이 소설은 허삼관의 매혈에 관한 이야기다. 허삼관은 일생을 통 털어 열 번 피를 판다. 피를 팔기 전엔 오줌보가 터지도록 물을 마시고, 400㎖의 피를 팔고, 판 후에는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돼지간볶음과 데운 황주를 주문한다.

피를 팔기 전과 판 후의 행동은 반복되지만, 피를 팔아야 하는 상황은 항상 다른 방식으로 찾아온다. 그러니 피를 판 후에 받은 돈의 쓰임 역시 다를 수밖에. 우리 삶을 이루고 있는 삶의 모습은 항상 비슷해 보일지 모르나 그 세부는 다르다. 그런 간명한 이야기를 이 소설은 위트 넘치게 펼쳐 내고 있다.

문화대혁명 때 허삼관의 아내 허옥란은 가장 번잡한 거리에서 ‘기생 허옥란’이란 나무판자를 걸고 하루 종일 의자 위에 서 있는 벌을 받는다. 허삼관은 세 아들에게 어머니에 밥을 가져다주라고 부탁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부분이 ‘허삼관매혈기’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낸다.

허삼관은 일락이에게 엄마한테 물과 밥을 가져다주라고 했다. 그러나 일락이는 가려고 하지 않았다.

“아버지, 이락이한테 가라고 하세요.”

그래서 이락이를 불러놓고 일렀다.

“이락아, 우리는 다 밥을 먹었지만, 엄마는 아직 못 드셨잖니. 그러니 네가 엄마한테 밥을 좀 전해드려라.”

이락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버지, 삼락이더러 가라고 하세요.”(222~223면)

작가는 “허삼관이 아들들을 불러모았다.”라고 하는 법 없이, 언제든 “허삼관은 일락이, 이락이, 삼락이를 불러 모았다.”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꼬마돼지삼형제’에서 집짓는 이야기가 반복적으로 서술되듯이 이 소설 역시 동일한 구조의 사건이 반복되고 변주된다.

2.

허삼관이 열 번 매혈을 했다는 것은 허삼관의 삶에 열 번의 가혹한 시련이 닥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열 번의 시련은 수사적으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 반복되는 구조의 변형을 통해 슬픔은 매번 다른 것으로 주조된다. 그리하여 허삼관에게 닥쳐 온 열 번의 슬픔은 동일하지 않는 슬픔으로, 차이 속에서 수 없이 분화하는 슬픔이 되어 모든 슬픔은 ‘한때’의 유일한 슬픔이 되어 그의 가슴 속에 각인된다.

가뭄이 심하게 들었을 때 피를 파는 허삼관의 내면과 아픈 일락이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열흘 동안 네 번 피를 파는 허삼관의 내면은 분명 다를 것이다. 작가는 허삼관의 내면을 묘파하는 대신 피를 파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형식들을 아주 미세하게 변형시킨다. 그리하여 허삼관의 내면은 변형된 형식들 속에서 주조된다.

허삼관은 피를 팔아 사랑을 얻고, 가족의 소중함을 깨달으며, 부성애를 발휘하게 된다. 허삼관은 피와 돈을 교환하였고 이 교환은 불공평하다. 공산주의 국가에서 자본주의 국가보다 더 혹독하고 착취적 교환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이 교환은 불공정하지만, 이를 통해 허삼관은 아내와 자식들에 대한 사랑, 그 관념적인 사랑을 물리적이고 물질적으로 깨닫게 된다. 인간의 피가 물질적 가치로 전락하는 것을 볼 때 슬프지만, 사랑과 같은 무형의 가치가 물질로 전환되는 부분에서 감동을 느끼게 된다.

3.

이 소설은 허삼관의 매혈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허삼관이 돼지간볶음과 황주를 먹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마지막 장면에서 허삼관은 아내와 더불어 그가 피를 판 후면 늘 찾아갔던 승리반점에서 예의 그 음식과 술을 시켜 먹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내 평생 이렇게 맛있는 돼지간볶음은 처음이야.”

허삼관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단순해 보이는데, 그는 처음으로 피를 팔지 않고 돼지간볶음을 먹고 있기 때문이다. 허삼관은 그동안 자신과 가족에게 닥친 불행을 자신의 피와 맞바꾸었다. 그렇다면 돼지간볶음을 먹는 일이란 그 불행을 씹어 삼키는 일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허삼관은 불행과 마주하지 않고, 처음으로 불행을 걷어 낸 돼지간볶음을 먹게 된 것이다. 그러니 이 음식이 어찌 맛이 없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허삼관은 예순이 되었고, 병원은 그의 피를 받아주지 않는다. 그는 더 이상 불행이 닥친다 해도 그 불행을 감당할 수 없는 나이가 되었다. 불행과 맞바꿀 수 있는 유일한 재산인 피를 모두 소진해버렸다. 삶의 온갖 역경 속에서 허삼관이 건져 올린 전리품이란 돼지간볶음 세 접시와 황주 한 병! 그것이 전부라면, 승리반점에서의 식사를 하는 허삼관의 삶을 ‘승리’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을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장면은 행복이라고도 그렇다고 슬픔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그 분화하는 틈 속에 허삼관의 삶을 위치시키고 있다. 곧 그것이 삶일 것이다. 이 소설의 마지막 줄은 이렇다.

 

공강일서울대 강사·국문학
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

“×털이 눈썹보다 나기는 늦게 나지만 자라기는 길게 자란다 ”

이 말은 ‘청출어람’의 중국버전 아니 저속한 버전쯤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스승보다 제자가 낫다’라는 의미로 주로 쓰이는 이 말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쪽풀에서 푸른빛이 났다고 해서 쪽풀의 빛깔과 쪽빛이 같을 수 없듯이 눈썹과 ×털은 모두 털이지만, 그 털은 같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허삼관이 한 열 번의 매혈은 결코 같은 의미의 매혈일 수 없다. 쪽풀이 곧 쪽빛일 수 없으며, 눈썹이 ×털일 수도 없다. 문화대혁명, 공산당의 부패 그런 부조리한 사회구조들이 허삼관을 둘러싸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의 삶은 이러한 억압적 구조를 오직 삶으로서 가뿐히 뛰어넘는다. 삶은 이어지고 이데올로기는 그 삶을 완전히 장악할 수 없다.

명심할 것은 삶의 형식들이 바뀔지언정 삶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 이러한 삶의 형식을 공산주의로 부르든 자본주의로 부르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삶은 어떤 식으로든 그저 삶일 것이고, 위화 역시 우리와 같은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은 자명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