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 등록일 2019.01.10 18:48
  • 게재일 2019.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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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희수필가
김순희수필가

신년회를 했다. 이십여 년 동안 친구로 지낸 사람들과의 만남은 늘 기다려진다. 한 달에 한 번은 꼭 보자고 하지만 바쁘다 보면 건너뛰기도 하고 서너 달 못 나온 친구도 있어서 한 번 시작한 수다는 끝이 없이 이어졌다.

어떻게 지냈는지 무엇으로 바빴는지 나누다 보니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딱 맞았다. 나를 포함한 네 명 모두 쓴 감투가 여러 개였다. 아파트에 살고 있는 세 명은 통로 반장을 몇 년째 맡고 있었고 주택에 사는 친구는 다들 맡기 싫어하는 돈 관리와 서기까지 도맡아 고생했다고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새해에는 절대로 아무 감투도 쓰지 않을 거라고 하며 나처럼 열심히 살지 않을 거라고 했다. 내가? 하고 되물으니 우리 중에 제일 열심히 살고 있지 않느냐고 했다. 열심히 살지 않기로 마음먹고 살았는데 아직도 열심히 살고 있다는 말인가.

몇 해 전까지 나는 계획표 짜는 것을 즐겼다. 12월이면 다이어리를 사서 새해에 하고 싶은 일 10가지, 해야 할 일 10가지를 적었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 세부적인 방법도 써가며 세워둔 계획을 하나씩 클리어 하는 재미로 살았다.

일 년에 책 30권 읽기, 한 달에 영화 3편 이상 보기, 한 달에 한 번 이상 여행하기, 매일 5매 이상의 일기 쓰기 등등. 되도록 세세하게 짜야 지키기 쉽다며 12월 한 달 동안 생각날 때마다 추가해서 1년을 계획했다.

서른 권의 책 목록을 만들고 독서회 세 개는 기본으로 참여한다. 영화관에 가기 힘들 때는 다운받아서 보고 기록으로 남겼다. 세 편은 거뜬히 넘겼다. 여행하는 일만 마음처럼 쉬운 게 아니어서 늘 계획과 어긋나기 일쑤였다. 5매 이상 일기 쓰기도 처음에 힘들어서 그렇지 한 달 쯤 지속하니 30분 만에 한 편 완성하게 속도감이 붙었다.

계획은 늘 타이트하게 목표치보다 높게 세웠다. 화살을 과녁에 정확하게 맞히려면 과녁 그 너머를 겨냥해서 힘을 써야 한다는 생각에 내 능력 이상을 채우려 애썼다. 가다가 아니 가면 간만큼 이익이라는 말도 있기에, 작심삼일은 개나 줘버리라고 외치며 늘 나를 다그쳤다.

열심히 사는 게 옳다고 믿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옳게 사는 삶이, 계획표에 나를 맞춰 사는 삶이 곧 행복한 인생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낮아진 자존감에 기운도 딸리고 눈도 침침해져와 하루하루가 버거워지던 참이었다. 잦은 몸살에 어쩔 수 없이 속도를 늦추어 서니 체력이 떨어졌는데도 간신히 버티며 살고 있는 내가 보였다.

인생은 단거리 뛰기가 아닌 마라톤이다. 멀리 가려면 체력이 필수이다. 나에게 맞는 운동이 무얼까 찾다가 계단 오르기를 하기로 했다. 전국노래자랑의 명MC 송해님도 한다는 운동이다. 체육관에 오가는 시간도 필요없고 별다른 도구도 필요없다. 그러니 비용도 0원이다. 잘 하겠다는 욕심은 접어두고 일주일에 서너 계단을 추가하며 오르다보니 두 달이 지난 지금은 36층을 오르는데 15분이면 가능하다. 물론 내려올 때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숨고르기를 한다. 덕분에 허벅지가 살짝 얇아진 것을 느낀다.

일 년 만에 성경 일독 하려고 하루 30분 이상 읽던 것도 마음을 바꿨다. 왜 일 년이어야 하나 평생 일 독이면 어떠랴 하니 마음이 가벼워져서 하루 한 장만 읽기로 했다. 1~2분이면 충분했다. 부담스럽지 않은 시간이라 3년 넘게 지속할 수 있었다. 평생 한 번 읽자고 한 것이 다음 달이면 완독가능하다.

매일 쓰던 일기도 신명나면 쓰고, 영화도 땡길 때 보기로 했다. 취향에 맞지 않는 책을 읽을 때는 독서회도 건너뛰고 보드게임을 배웠다. 반장도 새로 이사 온 집에 슬쩍 넘겼고 지각하면 큰일 날 것처럼 서두르던 모임도 한두 번 빼먹으니 학창시절 엄마 몰래 오락실 갈 때처럼 짜릿했다. 무슨 일이든 내 방식대로 내 리듬에 맞춰 즐거울 만큼만 하기로 했다. 멀리 오래가기 위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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