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 년씩이나 묵은 숙제를 해내야 하는 기분은 뭐라 말할 수 없을 만큼 쓰디쓰다. 그런 숙제 가운데 하나가 동인지 ‘창조’에 관한 것이다. 처음에 근대 ‘초기’ 잡지에 관한 논문 모음집을 내기로 해서 시작한 게 나만 빼놓고 다 썼으니 골치 덩어리라는 말을 들어도 할 말은 없다.

그래도 벌써 그 삼 년 전에 쓰기는 한 번 썼건만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다시 꼭 써야 한다고 마음먹고 함께 책 내는 것까지 미루고 미뤄 가며 오늘까지 온 것이다. 그랬더니 어언 세월이 흘러 벌써 ‘창조’가 세상에 나온지 백 년이나 되어 버렸다. 올해는 기미년 3·1운동 백 주년이 되는 해, 바로 그 해에 김동인, 주요한, 김환, 최승만 등이 함께 월간지를 겨냥하고 펴낸 ‘창조’도 나온 것이다. 창간호에 그들이 남긴 말은 뜻밖에도 소박하고 방어적이다. “우리는 결코 도덕을 파괴하고 멸시하는 것은 아니올시다, 만은 우리는 귀한 예술의 장기를 가지고 저 언제든 얼굴을 찌푸리고 계신 도학선생의 대언자(代言者)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또 우리의 노력을 할 일 없는 자의 소일거리라고 보시는 데도 불복이올시다.” 아마도 그들의 예술주의(또는 예술지상주의)는 일제 강점이라는 절박한 현실 앞에서 한가한 태도라는 오해나 빈축을 꽤나 사기는 샀던 것 같다. 그들은 첫 동인지를 내고 일 년을 넘긴 1920년 7월 발간 제7호에 이르러서야 웅장한 포부를 담은 우렁찬 목소리가 되어 지상에 나타난다.

“동방에 혁혁하던 우리 반만 년의 문화가 오늘날 당하여 이렇듯 쇠퇴하고 암담함이 이 어이한 일이냐?

퇴계, 율곡, 솔거, 이녕(李寧) 등 선배들이 유원(幽遠)한 철학과 불후의 예술을 끼쳤으나 후인이 이들을 알지 못하고 또 배우지 아니하여 그들의 명저는 헛되이 티끌에 묻혀 좀이 먹고 그들의 걸작은 땅 속에 썩어져 그 자취를 찾을 수 없도다. 돌아보건대 근대의 문인 재사들이 한갓 희롱과 유흥으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지었고. 그중에 특출한 천재가 있으면 관인이 압박하고 인인(隣人)이 시기하여, 마침내 말라 죽어버렸도다. 그리하여 마침내 세계문명사에 한 줄의 기록을 볼 수 없게 되었도다. 이제 세계는 일전하여 과거의 물질적 과학시대를 떠나서 아름다운 문화의 서광이 바야흐로 비취는 신천지로 들어가려 하는도다. 이에 세계 인류는 다투어 이상향을 찾고 문화적 신생활을 동경하는도다. 저들의 처연한 문화의 꽃이 피는 것을 바라보는 오인(吾人)은 내부 생활에서 일어나는 충동과 요구를 참지 못하여 힘없는 주먹을 부르쥐고 소리를 높여 부르짖노니 먼저 반도의 쇠잔한 예술을 부흥케 하여 위로 선인들의 면목을 빛내고 앞으로 우리도 이상적 신문화를 창조하여, 그리하여 세계의 대운동에 보조를 맞추어, 다소의 공헌이 있게 하고 우리 인류 본연의 참생활을 맛보며, 아울러 인생 천품의 행복을 누리자 하노라.”

이 목소리는 분명 기미 독립 선언서의 웅장함을 닮아 있지 않은가. 그들은 폐허의 고아들이 아니요, 선배와 선조를 알고 자신들의 역사적, 예술적 책무를 자각한 이들이었다. 그러니 이‘창조’ 동인들의 독립 정신도 결코 단순했다고만은 말할 수 없다.

/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