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 영천서 발견된 ‘민간조보’
유형문화재 제521호 지정
1508년 중종실록서 첫 언급
세계 최초 독일신문보다
140여년 앞서 발행돼
왕과 신하의 회의·인사·동정 등
중앙 왕실과 지방 소통 목적
국학진흥원, 조보 소재 웹진 발행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521호 지정된 세계 최초 일간신문 ‘민간조보’.  /한국국학진흥원 제공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521호 지정된 세계 최초 일간신문 ‘민간조보’. /한국국학진흥원 제공

한국국학진흥원이 최근 ‘조보:조정의 기별’을 소재로 한 스토리테마파크 웹진 담(談) 1월호를 발행했다.

조선시대 조보는 매일 아침 왕과 신하들의 회의가 끝나고 나면 승정원의 관리가 ‘조보소(조방)’에서 그날의 주요 소식을 전한 것이다. 각 관청에서 나온 ‘기별서리’는 구두로 전달하는 내용을 종이에 옮겨 조보를 만들었다.

한양에 있는 양반들은 매일 아침 조보를 받았다. 지방의 관리나 양반은 5∼10일 정도 걸렸다. 하지만 당시의 어려운 교통 환경을 고려하면 조보 발행에 상당히 많은 자원을 투자했음을 알 수 있다. 조보를 통해 중앙과 지방이 긴밀히 소통하고자 하는 의도였다. 조보라는 용어는 조선왕조실록 1508년 3월 14일 중종실록 5권에 처음 거론됐다. 이는 현재 세계 최초 일간신문으로 알려진 독일의 ‘아이코멘데 차이퉁’(1650)보다 140여 년 앞선 것이다.

하지만 그 실물이 없어 인정받지 못하다가 2017년 4월 경북 영천에서 선조 10년(1577) 활판 인쇄로 발행한 민간조보의 실물이 발견됐다. 경북도는 지난 2일 이를 유형문화재 제521호로 지정했다. 이 민간조보 또한 ‘아이코멘데 차이퉁’보다 83년이나 앞섰다.

1515년 중종이 “조보는 예부터 있는 것이다”고 언급한 것으로 보아 조보 기원은 그 이전으로 추정할 수 있다. 민간조보는 왕과 사대부들의 전유물이었던 조보에 대한 일반 백성들의 갈망을 배경으로 한다. 양반을 제외한 일반백성들은 조보를 읽을 수 없었지만 알 권리 충족을 위해 민간조보가 만들어졌다고 추정된다.

조보는 손으로 썼으나 민간조보는 활판 인쇄됐다. 백성들은 이를 돈을 주고 구독했다고 한다. 민간조보는 관의 허락을 받아 발간됐지만 3개월 만에 선조에 의해 폐간된다. 민간조보가 유통된 일에 대해 선조가 크게 노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후 민간조보를 발행한 이들은 가혹한 형벌과 유배에 처했다고 전해진다.

조보 내용은 대체로 관리 임면, 이동, 승진 등 인사 동정 기사가 가장 많았다. 국왕 동정 기사, 날씨·기상·천문 관련 기사, 사망 기사, 농사기사, 범죄기사, 자연재해 기사, 외국 동정 기사 등이 실렸다.

현재 대통령 비서실에 해당하는 승정원에서 조보를 매일 발행했다. 전쟁 중에도 펴냈다. 승정원에는 기자 역할을 하는 ‘주서’가 도승지 감독 아래 날마다 조보를 작성했다. 여러 가지 기사 가운데 취사선택을 해야 했고 빠른 속도로 알아보기 쉽게 글씨를 써야 했다. 조보에 기사가 실리는지 빠지는지, 어떤 내용인지 등은 정치인에게 예나 지금이나 매우 민감한 사안이라 많은 공격을 받기도 했다. 조보에도 보도지침이 있어 군사기밀이나 비밀을 요하는 내용은 다루지 않도록 했다. 이런 지침을 어기면 형벌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조보를 읽는 독자들 생각과 의견은 선인들 일기에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16세기에 쓰인 ‘초간일기’ 저자 권문해는 공주 목사로 근무하던 1582년 1월 3일 새해 첫 조보에서 본인의 파직 소식을 듣는다. 죄수가 탈옥한 일 때문이다. 이에 대해 권문해는 ‘공무수행에 완전하지 못해 파직을 당한 것은 부끄러운 바가 있지만 고향으로 돌아가 독서와 교유의 시간을 보낼 수 있다고 하니 새로운 기대가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고 적었다.

한편 한국국학진흥원은 2011년부터 스토리테마파크 홈페이지에 조선 시대 일기류 244권을 기반으로 창작소재 4천872건을 구축해 검색서비스를 지원하고 있다.

/손병현기자 why@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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