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한동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김정은의 신년사 발표 스타일이 달라졌다. 탁자에 기대어 불안한 모습으로 신년사를 읽던 작년의 모습과는 완전히 파격적이다. 그는 자주 입던 인민복을 벗어던지고 말쑥한 정장 양복 차림으로 만연체 연설을 이어갔다. 노동당 중앙위 건물 3층 집무실 소파에 앉아 50여분간 신년사를 발표하였다. 그는 원고와 프롬프터를 번갈아 보면서 과거의 가쁜 숨을 내쉬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의 이러한 변모는 대중 기피증이 심했던 그의 선친 김정일과는 완전히 달라진 장면이다. 그는 문재인 대통령 방북 시 평양 군중들 앞에서 카퍼레이드도 하고 대중 연설까지 하였다. 김일성 광장의 수십만의 군중 앞에서 예상과 달리 ‘전 인민에게 영광 있으라.’라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사라지던 부친 김정일과는 대조적이다.

이번 신년사로 김정일의 집무실 모습이 세상에 노출되었다. 값비싼 서양식 소파, 잘 정돈된 책장과 수많은 책들,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 발표하는 그의 뒤에는 인공기와 노동당기가 비치되어 트럼프의 집무실 모습과 비슷하였다. 사실 북한 권력의 심장인 그의 집무실은 신비의 베일에 덮여 있었다. 북한 땅에서 완전무결하다는 ‘당이 결정하면 인민은 따른다’는 철칙만 통했다. 그의 집무실 신년사 연출은 북한이 개방적이고 정상국가로 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2018년 자정을 넘어 새해 새벽의 녹화도 열심히 일하는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주자는 뜻일 것이다. 여하튼 이번의 신년사는 발표 형식면에서는 지난 7년과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다. 형식이 내용을 규정할 수 있다고 달라지려는 그의 모습은 나쁘지 않다.

그러나 신년사를 발표하는 그의 뒷면에는 김일성 할아버지와 김정일 아버지의 대형 사진이 걸려 있다. 두 분 다 정면을 보지 않고 서류를 보면서 일하는 장면이 찍혀있다. 먼저 가신 두 분처럼 그도 열심히 일하겠다는 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일까. 우리는 잘 알지만 서양 사람들은 뒤의 두 분의 사진이 누구인지 궁금했을 것이다. 그 사진 속의 인물이 북한을 70년간 통치한 할아버지와 아버지 사진임을 알고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북한 당국은 이번 집무실 회견 공개가 3대 세습체제를 세상에 알리려고 한 것일까. 서방에서는 아직도 북한식 3대 권력 세습 제도도 백두 혈통이란 것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번 신년사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곳곳에서 다급한 의도를 표출하였다.

그는 미국 트럼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재차 촉구했다. 그러나 미국은 북한의 분명한 핵 폐기 프로그램 제출을 요구하고 북한은 가시적인 대북제재 제 조치를 요구하고 있다. 그는 미국의 대북 제재를 ‘가혹한 경제 봉쇄’정책이라고 고통을 호소했다. 다행이도 트럼프는 북한의 친서와 신년사에 만족한듯 북미 정상 회담을 이른 시일 내 개최한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회담 장소를 베트남이나 몽골 또는 한반도 비무장지대로 예비점검했단다. 그러면서도 미국은 회담을 서두르지 않겠다는 상반된 입장을 보인다. 이에 김정은은 협상이 지연되면 ‘새로운 길’이라는 카드를 쓸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 길이 과거의 핵·경제 병진노선으로의 회귀는 아니겠지만 대미 압박용임은 부정할 수 없다.

이번 신년사 중에 눈길이 가는 대목이 하나 더 있다. 김정은이 ‘경제 노선’에 관한 집념을 계속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석탄 생산을 다그치고, 관광사업도 하겠으며, 조건없이 금강산과 개성공단을 개방하겠다는 것이다. 한편 당 간부들의 관료 부패를 막겠다는 입장도 분명히 하였다. 이미 시장경제 초입에 들어선 북한에도 수없는 관료부패가 있다는 증좌이다. 물론 북한에서 부패한 당 간부 청산이 조직의 숙청수단으로도 이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김정은의 신년사는 형식면에서 파격적으로 바뀌었고 내용면에서도 변화의 조짐을 감지할 수 있다. 김정은의 신년사를 통한 깜짝 변신이 북한 개혁·개방의 신호탄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