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에 드러나면 짜안해지는 것들이 있다 /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쌀밥에 햇살이 닿으면 왠지 슬퍼진다 / 실내에 있어야 할 것들이 나와서 그렇다. / 트럭 실려 가는 이삿짐을 보면 그 가족사가 다 보여 민망하다 / 그 이삿짐에 경대라도 실려 있고, 거기에 맑은 하늘이라도 비칠라치면 / 세상이 죄다 언짢아 보인다 다 상스러워 보인다.

이문재 시 ‘햇볕에 드러나면 슬픈 것들’ 첫 구절입니다. 자기 자리에 있어야 할 것들이 그곳을 떠났을 때의 슬픔을 시인은 노래합니다. 저택에서 끄집어 낸 이삿짐이나, 골목길 원룸에서 자취하는 이들의 이삿짐이나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안방에 있어야 할 침대와 경대는 안방에, 거실에 두어야 할 소파는 제 자리에서 삶에 녹아들 때 아름답습니다. 부자나 빈자의 살림이 다를 리 없습니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은 이처럼 골목길에 내다 놓은 이삿짐과 비슷합니다.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나만의 세계, 즉 단단한 내면이 자리매김해 있을 때, 곧 내가 나다울 때 비로소 우리는 존재 그 자체로 빛납니다.

어떻게 나다운 삶을 찾아갈 수 있을까요? 낯선 지역에 조난당한 이들은 탈출하기 위해 애쓰지만 결국 큰 원 형태를 그리면서 제자리를 빙빙 도는 현상을 반복합니다. 이를 윤형방황(輪形彷徨)이라고 하지요. 이 상태에서 빠져나오는 유일한 방법은 더듬더듬 잰 걸음으로 걷지 않고 과감하게 성큼 앞으로 나가는 발걸음입니다. 이처럼 나다운 삶을 찾는 것도 인생의 큰 그림을 과감하게 그려보는 작업을 통해 찾아낼 수 있습니다.

글쓰기 수업을 할 때, 첫 시간에 늘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너 자신의 글을 쓰라’는 것입니다. 대개는 글쓰기를 두려워하죠. 문자로 어렵게 꺼낸 나의 내면을 보고 사람들이 붉은 펜으로 그어대며 재단한 경험으로 인해 우리 안의 천재성은 잔뜩 움츠러듭니다. 내면의 검열관이 등장하기 시작하고 아예 글쓰는 것 자체를 포기하게 만들지요.

인생은 한 권의 책쓰기와 다르지 않습니다. 검열관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남의 기준에 맞춰 골목길 이삿짐처럼 살 것인지, 내면의 검열관을 과감하게 찌르고 나 자신으로 살 것인지를 선택하는 일이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Aliquid et de tuo profer! (알리꾸이드, 에뜨 데 뚜오 프로퍼). “이제 너 자신의 것을 보여 주어라!”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의 말입니다. 2019년은 그대와 제가 노철학자의 현명한 조언에 귀 기울이는 아름다운 한 해이기를 소망합니다. /조신영 생각학교ASK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