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길수수필가
강길수
수필가

가로수들이 자신의 내부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서 있다. 매서운 북극 높바람이 사정없이 몰아쳐도 윙윙 소리만 낼뿐, 끄떡도 않는다. 사람들은 방한복에다 귀마개와 마스크까지 끼고 종종걸음인데, 훌훌 벗은 저 나무들은 매서운 칼바람에 어찌 저리도 의연할까. 그 모습이, 조그만 변화에도 안달인 나를 부끄럽게 한다.

지난 늦가을, 이 거리는 나무들이 벗기 경쟁이라도 벌이듯 낙엽이 그득했었다. 붉은 옷, 노랑 옷, 갈색 옷, 모두 벗으며 시나브로 속을 드러내는 나무들의 모습이 마치 성스런 의식이라도 치르는 것만 같았었다. 한줄기 하늬바람에 팔랑팔랑 나비되어 나르던 낙엽들부터, 막 시작되는 북풍에 우두둑 떨어지며 시야를 가리던 낙엽까지 거리는 온통 나무들이 옷 벗는 의식으로 분주했었다.

봄에 가지에서 싹터 생명을 뽐내며 자라나, 나무마다 하나의 왕국을 이루어냈던 나뭇잎들. 살아있음의 기쁨을 삭막한 도시에 한껏 선물하며 봄, 여름, 가을 한생을 살았다고 미련없이 가지를 떠나던 낙엽들. 보이는 외부 왕국을 해체하고, 보이지 않던 내부왕국을 보여주는 의식처럼 그 모습이 마음에 다가왔었다.

젊은 날, ‘실바 마인드컨트롤’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나 구체적 내용은 별로 기억나지 않지만, 아직 마음에 남은 것도 있다, ‘사람의 사고(思考)는 두 세계를 바라보는 커다란 눈[目]과 같다’는 말이었다. 즉, 내부세계와 외부세계 또는, 객관적 세계와 주관적 세계 혹은, 물질세계와 상상의 세계가 그것이다. 한주간의 강의를 마친 후 수강자들이 수련모임을 만들어 강의 내용을 복습하고 연습하기도 했었지만, 지도자가 없어선지 얼마 후 모임은 흐지부지됐었다.

하지만 많은 시간이 흐른 다음, 아마도 지천명 중반기쯤에 강의시간에 들었던 말이 불쑥 마음속에서 되살아 나왔다. ‘사람은 내부왕국을 보며 사는 게 더 중요하다’는 말이었다. 그때부터 내부왕국 곧, 자기 마음속을 전 보다 더 잘 살펴보고, 귀를 기울이며, 헤아리고, 행하며 살려고 하였다. 여행을 좋아하던 마음이, 내부왕국의 여행에도 관심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바뀌었다. 관광지에서 대부분 피상적으로 보거나 느끼는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도 생각하게 되었다.

나아가 역지사지(易地思之)도 더 잘 하며 지내자고 마음먹기도 하였다. 남의 말을 더 잘 들으려 마음 쓰고, 상대방의 입장을 한번이라도 더 고려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등산이나 산보 땐 길옆 풀과 나무들을 더 유심히 살피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지기도 하였다. 주위의 작은 것들 이를테면, 보도블록 위를 기어 다니는 개미, 공원에 사는 도시의 새들, 도로나 담 틈바구니에 사는 풀과 꽃들같은 존재들에 관심을 두는 일 등이었다.

기해년 새해가 밝았다. 이 송구영신의 시기에, 왜 앙상한 가지들이 마음에 파고들어오고 있을까. 그 것은 필시 내 내부왕국이 저 나무들처럼 튼실하지 못한 때문일 게다. 생의 가을 기를 접하며 내부왕국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모습을 잘 살펴보자던 마음이 풀어진 때문일 터다. 활엽수들은 해마다 한 번씩 내부왕국을 활짝 드러내어놓고 칼바람 단련을 받는데, 나는 그러지 못하고 느슨하게 올 한해도 살아온 것이리라. 좋은 게 좋다는 적당주의에 매몰된 채, 시간만 축내왔기에 앙상한 가지가 세모에 내 마음을 혼내주려는 게 아니겠는가.

비록 세월이 하 수상하더라도, 저 거리의 앙상한 나무처럼 외부왕국의 옷을 모두 벗어버리고 북쪽 칼바람을 의연히 대처하고 이겨내야 하지 않겠는가. 내부왕국의 모습을 보고, 소리를 들으며, 그 길을 걸어가는 일이 될 것이므로. ‘호랑이 굴에 들어가더라도 정신을 차리면 산다’는 우리네 속담은 바로, 사람은 자기 내부왕국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살아내라는 메시지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