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키 기요시(三木淸, 1897.1.5~1945.9.26)라는 옛날 일본의 비평가가 있다. 말을 듣자 하니 나중에 이 사람은 공산주의자를 숨겨주었다는 죄목으로 일제 말기에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한다. 그는 명문인 교토대학을 나왔는데, 니시다 철학이라고, 동양의 선과 칸트를 연결시킨 학파에서 공부를 배웠다고 한다.

이 교토대학에는 니시다 말고도 하타노 세이치라는 신칸트주의자도 있었는데, 그는 내가 이광수 연구를 하면서 한 번 살펴 봤던 인물이기도 하다. 이 하타노는 교토대학에 오기 전에 와세다대학에 재직했는데, 그 시기가 이광수가 이 대학 철학과에서 공부할 때와 겹침을 알수 있다. 나는 이광수 소설 ‘무정’에 등장하는 ‘전인격적’ 인간이라는 문제를 하타노 세이치가 수용한 칸트에 대한 인간학적 해석에 연결지어 보고자 했다.

신칸트주의는 여러가지로 해석되지만 어딘가에 따르면 대략 말하여 칸트 사상을 인간학으로 보는 경향을 가리킨다고도 한다. 칸트는 ‘순수이성 비판’, ‘판단력 비판’, ‘실천이성 비판’을 썼고, 나중에 ‘인간학’을 썼는데, 이 ‘인간학’은 인간 정신 영역의 세 구성 부분, 즉 ‘지, 정, 의’에 대한 탐구에 해당하는 ‘3비판서’를 종합하는 의미를 갖고 있었을 것이다.

독일에 유학했던 하타노 세이치처럼 미키 기요시도 이 하타노의 ‘주선’으로 독일로 가 하이데거에게서도 강의를 듣는 등 독일 현대철학을 두루 섭렵하게 되지만 나중에 프랑스에서 파스칼의 ‘팡세’를 새로 접하고 깊은 감명을 받고 자신의 첫 저서 ‘파스칼의 인간 연구’(1926)라는 것을 쓰게 된다.

‘파스칼의 인간 연구’는 모두 여섯 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앞의 두 장은 ‘팡세’에 관한 것이고 아주 명철한 데가 있다.

내게 특별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런데 이 책의 네번째 장 ‘세 가지 질서’ 부분이다. 인간의 삶에는 세 가지 층위가 있다는 것이 그 요지인데, 제1의 질서는 신체요, 제2의 질서는 정신이며, 제3의 질서는 ‘자비’에 의한, 곧 신적인 삶이다.

파스칼이 말하기를, 제1의 신체적 삶을 대표하는 것은 왕후나 부자나 장군의 생활이다. 제2의 정신의 삶을 대표하는 것은 학자, 박식한 자, 발명가 등이다. 제3의 신앙적인 삶을 대표하는 것은 그리스도, 바울,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사람들이다. 흥미로운 것은 파스칼이 이 세 개의 삶의 질서는 서로 이질적인 것이며 서로 침범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는 이런 식으로 말한다.

“제왕은 권력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행했던 인간이다. 그에게는 그 자신에게 고유한 위광과 영화가 있다. 그는 지식 없이도 한계 없는 힘을 집중시킨다. 학자는 육적인 크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아르키메데스가 왕자였다고 해도 그가 그의 기하학 저서에서 왕자로 행동하는 것은 쓸모없는 일이다.” 여기서 나의 논의는 일단락 된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신체로? 정신으로? 신앙으로? 물론 파스칼은 신앙적인 차원의 삶이 가장 고차원적인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미키의 ‘세 가지 질서’ 장에 따르면 또한 이 세 개의 서로 다른 차원은 각기 다른 영역이다.

나는 내 자신에게 새삼스럽게 묻는다.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 나는 어떤 삶을 사는 사람인가? 이 물음을 나의 삶을 위한 새로운 화두로 삼아보는 날이다. /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