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형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

“내수침체·생산설비 투자 감소, 자고나면 2천500곳 ‘줄 폐업’, 2년 연속 폐업사업자 90만 돌파” 2018년 마지막 주말 어느 포털 사이트 메인 기사 제목들이다. 희망적인 이야기는 찾아 볼 수 없었다. 이런 비극적인 기사들 속에서 딱 한 사람만은 웃고 있었다. 사진에는 2019년 새해 국정 키워드를 ‘공감’으로 한다는 제목이 달려 있었다. 웃음이 나왔다. 쇼펜하우어는 관념과 현실의 차이를 웃음의 원인이라고 했는데, 현실과 너무도 동떨어진 대통령의 웃음이라? 사람들은 말한다, 웃을 일이 없다고, 아니 웃을 수가 없다고, 그런데 청와대 사람들은 무엇이 저렇게 즐거운지 모르겠다고, 국민이 주인이라고 해놓고는 왜 자기들 멋대로 하냐고!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북극 한파라고 불리는 최강 세밑한파보다 더 차가웠다.

거리마다 예비 정치인들이 내건 불법 가로펼침막이 공해를 일으키고 있다. 펼침막에는 하나같이 영혼없는 새해 인사와 함께 “희망찬 새해”라는 말이 똑같이 나온다. 불법으로 내건 펼침막에 버젓이 자신들의 이름을 적어놓은 그들에게 2019년이 정말 희망적인지 꼭 묻고 싶어졌다.

사전에서는 희망을 “어떤 일을 이루거나 하기를 바람, 앞으로 잘 될 수 있는 가능성”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주문을 외듯 여러 번 희망의 뜻을 읽었다. 그럴 때마다 “앞으로 잘 될 가능성”라는 부분에서 계속 멈추었다. 멈출 때마다 “없음”이라는 말이 자동적으로 따라 왔다. 없음을 붙여서 읽어 보았다. “앞으로 잘 될 가능성 절대 없음” 너무도 씁쓸했다. 이 말에 답이라도 하듯이 포털 사이트에는 “靑 ‘김정은, 文대통령에 친서, 서울 답방 강한 의지 나타내”라는 기사가 떴다. 씁쓸함은 곧바로 절망으로 바뀌면서 그 어느 해보다 시끄러울 2019년이 그려졌다. 시끄러움은 곧 혼돈과 혼란이고, 그 고통의 몫은 국민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북쪽이 마치 청와대 구세주 같네!” 식당 건너편 자리에서 뉴스를 보고 있던 사람이 툭 던진 말에 식당 안에는 북쪽 친서를 대하는 정부 태도에 대해 비판하는 격앙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결국엔 30대로 보이는 사람이 “짜증나 못 보겠다. 채널 돌려도 되지요.”라고 말하며 채널을 돌렸다. 사람들은 그제야 조금 진정하고 하던 식사를 계속하였다. 반찬은 청와대였다.

그런데 필자는 더 열을 받아 밥 먹기를 포기했다. 왜냐하면 바뀐 화면에서는 “SKY 캐슬”이라는 드라마가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을 안 보는 필자지만 주변에서 하도 말들이 많기에 재방송을 잠시 본적이 있다. 비록 드라마라고는 하지만 필자는 단 몇 분도 볼 수가 없었다. 어느 평론가는 “최상류층의 자녀 입시전쟁을 그린 ‘SKY 캐슬’”이라고 평하였다. 말이 좋아 입시전쟁이지 필자가 보기에는 명문대에 목숨을 건 광적(狂的)인 학부모들의 광적인 교육 이야기였다. 이 드라마는 교육의 유일한 목표가 명문대 입학으로 맞춰져 있는 이 나라의 광적인 교육제도에 대해 신랄하게 풍자한 작품이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 드라마의 이야기를 최근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수능 점수가 발표된 이후 동네 골목이나 학교 교문에는 “축, S대학교 합격”이라는 가로펼침막이 걸리기 시작했다. 그걸 보면서 과연 이 나라 교육의 정체성은 무엇인지 필자는 다시 생각해보았다. 그런데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왜냐하면 “축, S대학교 합격”이라는 펼침막 안에 모든 것이 담겨 있으니까. 현실은 이런데 정부는 계속해서 국민 우민화 교육정책들을 내놓으면서 교육 혼돈만 부추기고 있다. “고교 학점제, 내신 절대평가, 자유학기(년)제” 등이 과연 지금과 같은 교육 현실에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새해에는 희망만을 말하고 싶었지만 현실이 그렇지 못함이 안타깝다. 그래서 또 말한다, “2019 교육계의 시계는 제로이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