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처럼 정이 가는 물건이 없고 또 책처럼 징그러운 물건도 없다.

처음 손에 들었을 때 흔히 ‘그립’감이라고 표현하는 물성의 느낌은 아는 사람만 알지 모르는 사람은 모른다. 옵셋 인쇄에서 컴퓨터 인쇄로 바뀌면서 잉크 느낌이 많이 가시기는 했지만 그래도 화면에 띄우고 보는 글씨와는 완전히 다른 안정감을 선사한다. 편안하고도 그윽하다. 책에 고개를 박고 있는 순간들만큼은 세상 어떤 근심도 잊어버릴 수 있다.

이 책이 쌓이고 쌓여 자기가 살아가는 공간을 가득히 채우기 시작하면 근심이 비로소 생겨난다. 책이 부피며 무게 같은 물성을 지니고 있다는 게 그렇게 무섭게 느껴질 수가 없다. 때마침 나이도 들어가서 이 많은 책들을 보기는 언제 볼 것이며 두기는 어디에 둘 것이며 나중에는 누구에게 떠맡길 것인가가 전부 고민덩어리일 수밖에 없다.

또 다시 숙명처럼 책을 옮겨야 할 때가 되어 화물 용달을 부른다. 카카오 택시처럼 운송차를 주문하면 기사님과 연결해 주는 시스템이다. 무슨 일이든 사람을 잘 만나야 한다. 이삿짐 나르는 일, 책 나르는 일은 하루나절 걸리는 일이지만 더욱 그렇다고 본다. 그날 운이 좋아야 한다. 비용도 너무 아끼려 해선 안 된다. 일이 일답게 되도록 운수 좋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아침 아홉 시에 사람이 올 거라고 했는데 여덟시밖에 안 됐건만 벌써 신림 사거리란다. 왜 이렇게 일찍 오시느냐고, 저도 아직 못 갔다고 하니, 천천히 오시란다.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겠단다. 그렇게 만나 짐을 같이 옮기는데 아무 군말 없으시다 갑자기 당신 살아온 얘기를 꺼내신다.

전라도 장흥 사람, 나보다 열한 살 많은, 제대하고 나서 고향의 농사로는 미래를 기약할 수 없더란다. 큰아들이면서 무작정 상경해서 이 일 저 일, 나중에 친척 사업 도와주는 일을 했더란다. 호텔에 횟감을 대주는 일인데, 경기가 좋았단다. 나중에는 집도 장만하고 돈도 꽤나 만졌단다. ‘웬수’의 IMF를 만나 사업 망한 것은 물론, 빚까지 잔뜩 짊어지고 관악산 칼바위에 올라서 보기도 하셨더란다.

군에 있을 때 위문편지로 인연을 맺은 아내 생각해서 마음 돌이키셨단다. 도둑질, 살인만 아니면 무엇을 못하랴 하셨단다. 용달차 업체에 취직해서 십 년, 마지막에 사장님이 영업차 ‘넘버’를 하나 주셨단다. 한 번 살아보라고.

“세상에서 젤 미련한 사람이 돈에 눈이 뻘건 사람이제.”

뼈를 깎는 고생 끝에 빚 다 갚고 두 시까지는 용달 일을 하고 오후에는 아내를 도와 장사 일을 하신다는 ‘사장님’. 차로 한 시간 운송을 하시는데 차선 한 번 바꾸지 않으신다. 원칙대로, 남한테 절대 해 끼치지 않고 기어코 다시 한 번 일어서고 싶으시단다.

“다 남이 도와줘서 살았제. 나 힘만으론 여기꺼정 못 왔제.”

세상을 어렵게 헤쳐 온 사람들은 왜 그렇게들 마음이 고운지. 세상은 이런 사람들이 바꾸어 간다고 생각한다. 힘 있고 돈 많고 지식 부리는 사람들은 늘 거기서 거기에 있을 뿐이다. 지킬 게들 많아서.

/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