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강일서울대 강사·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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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려운 책

또 한 해가 저물고 있다. 벌써 내년에는 꼭 책 읽기를 시작하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책을 읽다보면 여러분은 아마 두 유형의 책을 만나게 될 것이다. 하나, 어려운 책. 둘, 어렵게 느껴지는 책. 여기에 동의한다면 먼저 어려운 책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

사람들은 어렵다고 느껴지는 글이나 어려운 글을 만나면 우선 그 글을 쓴 사람을 의심한다. 책을 쓴 사람이 아마 이상하게 썼기 때문일 거야, 라고 생각하려 한다. 이것이 자기중심적 생각이다. 문제가 생기면 외부가 아니라 자신을 먼저 돌아보기 바란다. 문제의 원인은 대부분 자기 자신에서 비롯되며, 문제의 해답 역시 자기 자신에게서 찾을 수 있기 마련이다. 우리가 곤혹스러운 문제를 만났을 때에도 어떤 식으로든 헤쳐나갈 수 있는 것은, 문제의 원인이 나이며 내 안에 답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니 어렵다고 느껴지는 글이나 어려운 글을 만나면 저자가 글을 못 써서 그래, 라고 자신을 합리화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의심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다.

진짜 어려운 글은 공부를 해야만 읽을 수 있는 글이다. 보통 글은 문맥을 통해 추론해내면 읽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진짜 어려운 글은 개념을 익혀야 하고 개념을 익히지 못하면 읽어낼 수 없다. 예를 들어 “밤하늘은 왜 어둡게 보이는가?” 나 “세계는 사물의 총체가 아니라 사실의 총체다.”와 같은 말을 말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 왜냐하면 이 말 속에는 과학사 전체, 철학사 전체가 압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무수한 주름들로 이루어진, 꽉 눌리고 접혀진, 그런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펼쳐나갈 때 말의 의미에 가 닿을 수 있다.

어려운 책은 우리에게 이걸 알아야 저걸 알 수 있노라, 고 말한다. 어려운 책은 이것을 모르고는 저것을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어려운 책은 귀찮고 성가시게 굴며, 하나하나 알아내라고, 부지런히 공부할 것을 종용한다. 그래서 우리는 어려운 책 읽기를 포기한다. 알아야 할 것이 너무 많아서 포기하고,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라서 포기한다. 하지만 알겠다고 마음을 먹고 알기를 시작할 때, 어려움은 풀리기 시작한다. 어려운 책의 어려움을 푸는 유일한 방법은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영화는 보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끝나지만, 책은 읽지 않으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결코 읽히지 않는다. 어려운 책 읽기를 포기하면 어려운 책은 결코 읽히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시작하는 순간, 그 순간이 실마리가 되어 어려운 책은 기어이 읽히고 말 것이다. 꼭 알고 싶은 내용인데 어려워서 저기 던져두었다면, 지금 당장 시작해야 한다. 문제는 풀어야 풀리고, 책은 읽어야 읽히니까.

2. 어렵게 느껴지는 책

나는 진짜 어려운 글보다, 어렵게 느껴지는 글이 더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진짜 어려운 글을 읽지 못하는 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쉬운 글만 읽어도 이 세상을 사는 데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어렵다고 느껴지는 글을 피하는 것은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정희진은 ‘어렵게 느껴지는 글’을 이렇게 말한다. “어려운 글은 내용이 어렵다기보다는 소통 방식에 문제가 있는 글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어려운 글은 없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글, 개념어의 남발로 누구나 아는 이야기를 아무도 모르게 쓴 글, 즉 잘 쓰지 못한 글이 있을 뿐이다.”

정희진이 말하는 ‘어렵다기 보다는 소통 방식에 문제가 있는 글’이란 무엇을 말하는 걸까. 여기서 ‘소통 방식’이란 곧 ‘사고방식’을 뜻한다. 특정한 대상이나 사건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이것이 소통방식을 결정한다. 이를 테면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서로 대화를 나눈다면 그들은 서로 다른 것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탄핵을 긍정하는 사람은, 국민이 준 권리를 최순실이라는 민간인과 나눠썼다는 것, 국민의 부여한 권리를 자기 마음대로 사용함으로써 국민의 기본권을 무시했고, 그러므로 탄핵을 당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탄핵을 부정하는 사람은, 박근혜 대통령은 최순실에게 그냥 이용만 당한 피해자일 뿐이라고, 국정농단을 한 최순실을 비판해야지 왜 박근혜를 비판하냐고 주장할 수도 있다.

만약 박근혜 탄핵을 진심으로 긍정하는 사람과 진심으로 부정하는 사람이 정말 말싸움을 시작한다면 그들은 서로의 말을 듣지 않고 자신의 말만 할 것이다. 그리하여 결코 합의점을 찾아가지 못할 것이다. 내가 말하는 ‘어렵다고 느껴지는 글’은 전혀 어렵지 않지만, 자신의 생각이 고집처럼 자기를 휘감고 있어 자신의 생각과 다른 글은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는 글을 말한다.

어렵게 느껴지는 글은 익숙한 방식을 고집한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생각을 한다. 정희진은 다시 이렇게 말한다. “‘근친강간(가족 내 성폭력)’이라고 써서 원고를 보내면 편집자가 오타인 줄 알고 ‘근친상간’으로 바꾸어, 나도 모르게 활자화되는 경우를 수없이 겪었다. 내가 장애인의 ‘상대어’를 비장애인이라고 쓰면 ‘정상인’이나 ‘일반인’으로 고친 후, “이 표현이 더 자연스럽다”고 오히려 나를 설득한다.”

가족 내 성폭력, 아버지가 딸을 성폭행하는 그런 일을 우리는 근친상간이라고 부른다. 얼마나 남성 중심적인 사회이기에 아버지의 일방적인 성폭행, 저 짐승같은 일 앞에서도, ‘남녀가 도리를 어겨 사사로이 정을 통함’이라는 뜻의 ‘상간’을 붙인다. ‘근친강간’을 ‘근친상간’이라고 바꿀 때, 피해자는 다시 한 번 더 피해를 입는다. ‘근친상간’이라는 말에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그만큼 남성중심적 세계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장애인’과 구별하기 위해 ‘정상인’이라고 부르는 행위는 또 얼마나 폭력적인가? 장애인의 상대어를 정상인이라고 말할 때 장애인은 비정상인이 된다. ‘근친강간’을 하고, ‘살인’을 하는 사람이 장애등급을 받지 않았다면 정상인으로 대접받는 사회, 장애를 가졌으나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비정상이라고 말하는 사회, 장애인과 정상인의 구분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은 얼마나 고립되어야 하는가.

해가 지고 한 해가 간다. 매년 반복되는 일인데도 낯설다. 그래서 계획을 세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다시 계획을 세울 때다.
해가 지고 한 해가 간다. 매년 반복되는 일인데도 낯설다. 그래서 계획을 세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다시 계획을 세울 때다.

자신이 믿고 있는 바를 바꾸지 않으려는 사람들, 자신의 믿음을 버리지 못하고, 자신의 믿음에 따라 다른 사람을 재단하고 비판하는 사람을, 우리는 전문용어로 ‘꼰대’라고 부른다. 따라서 나는 진짜 어려운 책을 읽지 못하는 사람보다 어렵게 느껴지는 책을 읽지 못하는 사람이 더 문제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상대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려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기에게 익숙하고 자기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책을 읽는 사람은 세계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이 알고 있는 세계만 이해하는 것과 같다.

‘어렵게 느껴지는 글’을 읽는 일은, 감옥에 갇힌 줄도 모른 채 수감되어 있는 우리의 사유를 해방시키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지구가 아니라 태양계가 돈다고 믿는 사람들은 갈릴레이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오히려 그를 죽이려 했다. ‘어렵게 느껴지는 글’을 읽지 않는 것은 내 말만, 내 생각만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나와 다른 말을 하는 사람을 무시하고, 그들의 삶까지 부정하는 일과 같다. 그러니 우리는 어렵게 느껴지는 글, 나와 생각이 다른 글까지 읽어야 한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새가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 때 비로소 세계가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민주주적인 사회라는 진실로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