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

여덟 살 때 외할머니 환갑잔치가 있었다. 열흘 넘도록 음식준비로 집안이 시끌벅적했고, 어른들 표정은 하나같이 밝았다. 어린 우리들은 구수한 냄새 넘쳐나는 부엌을 날랜 다람쥐처럼 넘나들며 이것저것 입에 넣기에 신이 났다. 우리가 알았던 정보는 ‘환갑’이란 어휘뿐이었다. 그것에 담긴 의미 반추는커녕 기본적인 뜻풀이조차 알지 못했던 천둥벌거숭이였던 시절.

추운 겨울날이었지만 그때의 활기와 왁자지껄한 분위기와 흥분이 기억에 새롭다.

마침내 그날이 왔다. 은비녀로 곱게 쪽머리하신 할머니가 토끼조끼와 한복치마로 한껏 멋을 내고는 병풍 앞에 놓인 의자에 앉으셨다. 의자 앞에는 그 동안 준비한 갖은 음식물이 담긴 거대한 잔칫상이 놓였고. 반백의 할머니가 엄숙하고 긴장된 독사진을 찍는 동안 우리는 옆에 서서 침만 삼키고 있었다. 이제는 구겨지고 탈색한 흑백사진으로 남은 그날 정경은 1960년대 한국농촌의 흔한 ‘환갑잔치’ 풍경의 하나가 되었다.

세월이 물처럼 바람처럼 달처럼 제비처럼 흐르고 또 흘렀다. 산천이 의구(依舊)하지 못한 지 어언 다섯 차례가 지나고 내가 외할머니 나이가 되었다. 서럽고 안쓰럽던 1960년대가 충격과 격동의 70년대로, 혁명적 파란의 80년대를 지나, 희망과 절망의 나락 90년대를 거쳐, 대망(待望)의 21세기 첫 번째 10년을 경유해, 2018년 세밑에까지 이른 것이다. 여덟 살 까까머리 소년의 머리에도 허옇게 상고대가 피어올랐다.

모든 세대는 지나간 세대에게 경의와 존경을 표명하기 마련이며, 그것은 이전시대의 위대함과 풍요로움을 예찬하는 형태로 드러난다. 4.19세대나 유신세대를 기리는 광주항쟁세대 혹은 87세대처럼, 요즘 세대는 87세대를 우러른다는 인상을 준다.

지난 세기 90년대 이후 한국사회에서 실종된 ‘거대담론’을 향수(鄕愁)하는 일부 청년세대에 국한될지라도, 그것은 시대와 역사를 향한 깨어있는 인간의 자연발생적인 예찬일 수밖에 없다. 반면에 미소(微小)한 것들로 충만한 시대를 살다보면 자질구레한 일상적인 것들에 눈이 많이 가기도 한다. 하루가 멀다않고 터져 나오는 이해관계의 충돌이나 변화무쌍한 국제정세에 대중은 더 이상 유념하지 않는다. 유치원 사태에 대해서는 어린아이 부모들과 유치원 주인들이, 카풀문제에 대해서는 택시업자와 정부 당국자가, 시리아 철군문제에 대해서는 극소수 세계주의자들만이 귀추(歸趨)를 주목하면서 사태추이를 관망한다.

대중은 먹을 것, 탈 것, 볼 것, 놀 것에 열광하지만, 그것들마저 이내 시큰둥하게 대한다. 사정이 이러니 10년이나 20년 혹은 한두 세대 이후의 미래전망이나 기획이 들어설 최소한의 공간조차 없다. 그러하되 60년 세월은 지극히 무겁고 엄중한 시간으로 다가온다. 그래서일까?!

현동 정동유 선생은 ‘환갑(還甲)’을 그저 60갑자 한 바퀴를 돈 것이 아니라, 새로운 육십갑자로 바뀐다는 의미로 ‘환갑(換甲)’을 이해했다. 한 바퀴 돌았으니 자동적으로 그 다음 바퀴로 전환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바퀴에 진입했다고 생각하는 동적이고 입체적인 사고방식이다. 나이만 많이 먹은 허다한 철부지들이 거들먹대는 현실을 들여다보면 매우 적실한 사유가 아닐 수 없다.

새로이 시작될 육십갑자를 목전에 두고 나는 요즘 간단치 않은 육체적 재건축에 나서고 있다. 이미 우심한 내장질환에는 치료약으로, 신통찮은 이는 이리저리 덧씌우고, 급기야는 백내장 수술에까지 이른 것이다. 그렇게라도 수리해서 전혀 다른 양상으로 다가올 인생 3막을 대비하고 있는 셈이다. 58개띠들의 상승(常勝)과 무운장구(武運長久)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