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룡서예가
강희룡
서예가

얇아진 달력을 보니 어김없이 또 한해가 기우는가보다. 이렇듯 해가 바뀌는 즈음에는 자기가 지나온 한해의 삶을 돌아보고 다가오는 새해의 삶을 설계한다. 사람이 사람답다는 것은 자기를 돌아보고 성찰할 줄 알기 때문이다.

지난 시간에 대한 시행착오와 잘못에 대해 성찰과 반성으로 스스로를 살피고 경계한 글을 자경설(自警說)이라 한다. 조선중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고봉 기대승(1527∼1572)의 ‘고봉집’에 실린 ‘자경설’을 통해 한해를 마무리지어본다. ‘옛 사람들은 지난 허물을 자책하여 스스로 경계한 것은 대체로 잘못을 마음 아파하고 앞으로 착하게 살려는 생각을 하기 위해서이다. 이는 성인과 현자들이 모두 뜻을 두고 공부하였던 것이다. 나만 어찌 홀로 그리하지 않겠는가! 부지런히 학문을 닦을까 했으나 뜻을 굳게 세우지 못하였고 굳어진 버릇을 없애지 못해 시간만 흘러 허송세월을 하였을 뿐이었다. 지난 시간과 내 행실을 헤아려 슬픔이 가슴을 가득 메워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지나온 일을 차례로 엮어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 자취를 밟아 경계를 삼고 한편으로는 권면으로 삼는다.’(하략)

고봉은 자경설에서 허송세월을 안타까워하였다. 지나온 삶의 허물을 곱씹는 것은 그런 과오를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고봉은 이황(1501∼1570)으로부터 신진사림의 대표로 인정을 받았고 실제로 명종 말에서 선조 초에 사림의 영수로 활약했다. 이황은 기대승의 인물을 더 다듬기 위해 뛰어난 자질을 함부로 드러내고 호탕한 습성에 얽매이고 방종한 놀이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였다. 이로보아 기대승은 날카로운 지성의 소유자로서 지적인 영민함을 드러내기 좋아하였고 이론논쟁에서 남들에게 지기 싫어하는 병통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봉은 선조 옆에서 조선건국 이래 드러난 내부 모순에 대해 비판을 아끼지 않았던 선비였지만, 날카로운 비판의식과 대쪽같은 성격이 결국 자신을 외롭게 만들자 44세에 관직을 내려놓았다.

그는 이를 말리는 임금에게 ‘군왕이 정사를 소홀히 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그것은 근본이 없는 것입니다. 백성이 고르게 잘 살도록 정치를 하지 않는다면 왕의 혜택이 아래까지 이르지 못하게 됩니다. 백성이 편안해야 나라가 잘 다스려지며, 백성이 만족하게 되면 군주는 누구와 더불어 부족함이 있으리까.’라는 말을 남겼다. ‘정조어록’에 ‘고봉은 호남의 가장 걸출한 사람이다. 높은 학문의 조예와 뛰어난 문장, 그리고 절의의 정대함은 삼절(三絶)이라고 할만하다. 퇴계와 주고받은 사칠논쟁(四七論爭)은 동이(同異)를 변별하고 분석한 수많은 말들이 의논이 뛰어나서 바로 창을 들고 방 안에 뛰어들 듯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봉보다 26년이나 연상인 이황은 이(理)를 보편이념으로 삼아 그것이 물질적 세계 밖에 실재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이것을 도덕규범의 근원으로 삼음으로써 봉건윤리의 절대성을 합리화하였다. 이에 기대승은 도덕성이란 칠정(七情)이 현실 속에서 도덕규범과 합치될 때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이 둘 사이의 논쟁은 조선후기의 성리학을 주리, 주기파로 나누는 연원이 되었다. 그러나 정작 논쟁의 당사자였던 퇴계와 고봉은 서로 깍듯한 예의를 갖추었으며, 묻고 배우는 입장에서 고봉은 퇴계를 스승으로 삼았다. 생각이 같은 상대도 좋지만 다른 생각을 가진 상대도 소중하다는 것을 일깨워준 일화다. 생각이 전혀 다른 이 둘은 가식적 화해나 억지스런 봉합없이 논리적 논쟁으로 중국의 주자학을 조선의 성리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의 지평을 열었다. 지금의 우리 위정자들이 반드시 교훈으로 삼아야할 사건이라 본다.

우리 모두 주어진 위치에서 ‘자신 바라보기’ 즉 지난 시간을 스스로의 성찰과 반성을 통해 자기를 살피고 또 경계하며 새로운 각오를 실천에 옮기는 새해를 맞이해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