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휘논설위원
안재휘 논설위원

얼마 전 친노(親노무현 팬클럽) 멤버를 자처하는 한 사업가와 술자리를 함께한 적이 있었다. 당연히 친문(親문재인) 활동을 하시는 분일 텐데, 굳이 친문이라고 밝히지는 않았다. 평소에 책을 좋아하고 시집을 찾아 읽기도 하기에 자연스럽게 문학 이야기가 소재가 되었다. 그런데 자리가 길어지면서 조금 취기가 돌 무렵에 내게 느닷없는 질문이 날아왔다. “KAL기 폭파된 것 틀림없나요?” “천안함 폭침이 맞습니까?”

사상검증에 들어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언짢았지만, 일단 참고 대답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국가가 조사하여 발표한 것을 저는 기본적으로 신뢰합니다.” 그러자 그는 “틀렸어요. 모두 다 조작이에요. 어떻게 그걸 믿어요?”하고 언성을 높였다. 가소롭다는 듯한 그의 눈빛이 느껴졌다. 조용히 웃으면서 대답해줬다. “틀린 게 아니라, 생각이 다른 거겠지요. 저는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정신적 장애인’들을 제일 딱하게 여깁니다.”

문재인 정권이 최대의 위기국면으로 몰려가고 있다. 이 정권은 치명적인 실수를 거듭하고 있다. ‘적폐청산’ 여론몰이로 정적들을 이 잡듯 잡아내는 행위부터 어불성설이다. 제왕적 대통령제를 종식시킨다면서 호기롭게 출범한 이 정권 역시 황제적 권력을 휘두른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모든 정책들이 ‘깜짝쇼’ 방식으로 추진되는 관행부터 올바르지 않다.

‘탈원전’ 정책은 최악이다. 나라 곳간을 거덜내고도 남을 실책이라는 항간의 지적이 그르지 않아 보인다.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과 ‘근로시간 단축’은 ‘일자리 정부’ 캐치프레이즈를 완전히 찢어발겼다. 상가 거리에는 인적이 사라졌다. 아이들에게 들으니 “8시간짜리 일자리는커녕 4시간짜리도 얻어내기 힘들다”고 한다. 경제는 바야흐로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캄캄한 동굴 속을 헤매고 있다.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이 발탁될 무렵 그가 국정감사장에서 했다고 알려진 “나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던 말은 정말 멋있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지금 이제는 슬슬 미심쩍어지고 있다. 굴러다니는 뒷얘기는 차치하고라도, 어째서 이 나라의 ‘적폐’가 온전히 한쪽 진영에만 쏠려 있을까 하는 합리적 의심 때문이다. ‘10대 0’ 경기도 재미없는데, 이 경기는 하물며 ‘1000대 0’처럼 느껴진다.

‘북한 비핵화’전선은 어찌 돼가고 있는가. 연내에 서울에 오리라 장담했던 북한 김정은 위원장은 다시 장막 속에 주저앉은 느낌이다. 김정은의 입만 쳐다보는 청와대의 모습은 자괴감마저 부른다. 11월 중간선거를 넘긴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속 타는 한반도의 민생들 속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리무중이다. 작금 ‘시리아 철군’결단을 바라보는 우리 국민들의 심사는 아찔하다.

‘청와대의 민간인 사찰 의혹’이 일파만파다. 김태우 전 특감반 수사관과 청와대 간 공방전에서 청와대는 일단 스텝이 많이 꼬였다. 감정을 삭이지 못하고 패착을 거듭하는 청와대의 뒤에 웅숭깊은 ‘확증편향’의 어두운 그늘이 보인다. 제1야당이 논란의 바통을 이어받았다.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청와대가 정치인·언론·교수·기업 등 민간인 사찰을 지속적이고 광범위하게 진행했다면서 관련 자료를 직접 공개했다. 한국당은 대통령실장과 민정수석을 직권남용 혐의로 고발했다.

청와대 박형철 반부패비서관은 정말 억울해하는 표정이다. 얼마나 열심히 하고 있는데, 이 난리를 치느냐는 눈빛이었다. 문득, 이면우 교수가 쓴 ‘생존의 W이론’에 나오는 ‘황포돛대 이론’이 떠올랐다. 청와대는 혹여 터무니없는 도덕적 우월감을 바탕으로,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고 필사적으로 노를 젓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면초가의 위기에 몰려 나라를 아예 거대한 폭포 낭떠러지 쪽으로 힘차게 저어가는 중이라면 정말 큰일이다. 나라 꼴이 참 말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