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화력발전소에서 참극을 당한 김용균 군은 24세였다고 한다. 꽃다운 나이다. 너무나 아까운 나이다.

꿈 못 이루고 떠난 김용균 군 나이만하던 때 나는 무엇을 했었나? 대학에 다녔고 다른 젊은이들처럼 1987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직후였다. 1988년 25세 때는 서울 올림픽이 개최되었고 비록 불안한 생활이었지만 어둡지만은 않게 보냈다.

오랜 세월이 흘렀다. 1980년대 전반기에 대학에 들어간 내가 처음 부딪친 서울의 장면은 캠퍼스 시위. 대학 자율화라고 해서 대학 안에서의 시위는 자유로웠고 시위대는 교문을 뚫고 거리로 나아가기도 했다 종로 같은 시내에서 기습 데모를 벌이기도 했는데, 그 무렵 청계 피복 노조 합법성 쟁취 대회라는 것이 열려 참석해 보기도 했다.

청계천은 평화시장 젊은 재단사 전태일이 서른두살 젊은 나이로 자신의 몸을 불사르며 근로기준법을 지키라고 절규한 역사의 장소였다. 지금 청계천은 인공 물이 흐르는 공원 같은 장소가 되었고 사람들은 거기 노니는 물고기들을 보며 휴식의 한 때를 보내곤 한다. 과연 거기 산책하는 사람들은 청계천의 역사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도시는 많은 것을 감춘다. 보도블럭 한 장만 벗겨내면 과거의 어두운 습지의 기억들이 당장이라도 묻어 올라올 것만 같은데, 현시, 전시되는 대도시 생활의 화려함과 세련됨은 과거를 수몰시키고 현재를 구가하라 한다.

세월은 그렇게 오래 흘렀지만 우리는 과연 얼마나 바뀐 걸까? 외화 벌어들이는 배를 건조하기 위해 구둣발로 정강이를 채이며 출근 신고를 하고 안전장비도 변변히 갖추지 못한 채 높디높은 뱃전에 매달려야 했던 시절로부터 우리는 얼마나 멀리 떠나온 것일까?

소문처럼 사람이 캄캄한 어둠 속에 갇혀버리면 용접을 다시 하느니 차라리 보상비를 챙겨주는 게 싸게 먹힌다는 식의 셈법을 우리는 이제는 청산해 버린 걸까?

김용균 군의 배낭에는 고장난 손전등과 건건지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거라도 가지고 있어야 어둠 속에서 위험을 그나마 피할 수 있을 텐데 비정규직 노동자인 그에게는 그 값싼 ‘장비’라고 할 것도 없는 것조차 제때 지급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김 군이 처참하게도 몸이 동강이 나 생명을 잃고 말았다는 대목에서 나는 입술을 깨물고 만다. 김 군에게 컵라면은 재미로 먹는 간식이 아니라 그 젊은 피와 육체를 돌게 하는데 쓰는 양식이었던 것이다. 누가 이 청년을 죽음으로 내몰았단 말인가?

나는 아니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다. 우리는 왜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가? 경제라는 그 괴물이 제대로 돌려면 위험과 죽음을 외주화 하는 것이 필수적이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그렇게 관리, 통제하는 게 없어서는 안된단 말일까?

이 나라는 돈의 논리 앞에서 예의도, 양심도, 원칙도, 동정도 모두 옛날처럼 지금도 버리려는가? 무언가 정말 바뀌지 않는다면 우리 젊은이들, 아이들에게 어떻게 이 나라를 사랑하라 할 수 있단 말인가? 지금 당장이라도 우리는 새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명을 돈보다 사랑하는 사람으로 말이다.

/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