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희수필가
김순희수필가

어릴 적 내 고향 할아버지 집엔 방이 많았다. 잠자는 방 이외에 고방도 있고, 쌀이 되기 전의 나락만 보관하는 방, 외양간 옆에 농기구만 보관하는 창고도 있었다. 마루 밑엔 사과궤짝을 넣어두었다. 밖에서 보면 안이 훤히 보이는 형태가 아니라 지하실처럼 사방이 막혀있고 작은 공기창만 뚫어 두고, 마루한쪽을 뚜껑을 만들어서 열고 닫았다. 할아버지가 쓰시던 사랑채 마루 밑에 넣어 둔 사과 때문에 늦가을부터 겨울동안 그 방 언저리에 가면 국광향기가 번졌다.

안방 건너편에 자리한 갓방에 군불을 지피면 그 뒷방까지 구들장이 연결되어 사람이 잠자기엔 서늘하지만 따뜻한 걸 좋아하는 물건들이 들어앉기에 좋았다. 뒷방엔 고구마나 호박같은 추위에 약한 것들을 보관했다. 고구마는 뒷방 윗목에 칸을 질러서 벽과 칸막이 사이에 고구마를 그대로 채워 놓았다. 친구네는 방 아랫목에 수숫대를 엮어 둥글게 세워놓고 거기에 고구마를 채웠다.

손을 여러 번 탈수록 상하기 쉬운 게 고구마이다. 그래서 처음 자리를 잡은 곳에 쭈욱 놔두고 필요한만큼 꺼내서 먹어야 한다. 겨우내 고구마를 꺼내 삶아서 점심 한 끼로, 군불 지피고 난 뒤에 남은 불로 구워낸 달달한 군고구마는 손자들의 군입꺼리였다. 부족한 쌀에 보태기 위해 밥 위에 얹어 먹다보면 그 양이 줄어들어 수숫대나 칸막이 안으로 집안의 아이들이 들어가야 고구마가 손에 잡히는 시기가 온다. 겨울이 깊었다는 걸 고구마 꽝이 알려주었다.

어느 날인가 언니와 내 친구 순연이와 미정이랑 마당에서 숨바꼭질을 했다. 우리 집은 건물이 여러 채라 숨을 곳이 많았다. 언니와 나는 아이들이 못 찾도록 뒷방 고구마위로 숨어 들어갔다. 뒷방 문만 열어서는 보이지 않아서 오래도록 술래가 우리를 찾지 못했다.

한참을 숨어서 킬킬 거리며 낮은 소리로 소근대는데, 언니가 갑자기 배가 아프다했다. 그럼 먼저 나가라니까 들키기 싫었던 언니는 술래가 ‘못 찾겠다 꾀꼬리’를 외칠 때까지 참다 참다가 그만 고구마 더미에 고구마를 닮은 것을 누고 말았다. 고구마 더미에 변을 본 언니가 어른들께 혼이 났는지. 우리가 거길 어찌 빠져 나왔는지 가물거리지만 냄새나는 고구마 더미에서 낄낄거렸던 장면은 선명하다.

우리 집 고구마는 물고구마였다. 물 빠짐이 좋은 터에 과수원 농사를 하며 몇 고랑 곁다리로 심은 고구마이니 더 했다. 색깔도 빛바랜 보라색이어서 보라색이라 하기에 듣는 보라색에게 미안할 정도였다. 물이 많은 곳이라 어찌나 잘 자라 크기는 또 어찌나 큰지 토막을 내서 솥에 넣어야 했다. 삶아 놓으면 물컹해서 타박고구마를 좋아하던 나는 영 입맛에 차지 않았다.

옆집 순연이네는 고구마도 유난히 붉었다. 가장골(어릴 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가장 깊은 골짜기라서 붙여진 이름이었다)에 밭이 있었다. 그곳은 흙빛도 붉었다. 그래서인지 고구마 순을 심어 놓으면 물이 베어서인지 진한 자색의 타박 고구마가 열렸다. 우리 할아버지는 왜 고구마를 모래밭인 과수원에 심어서 희멀건 고구마만 만들어 내냐고 철없는 나는 투덜거렸었다.

내 투정을 들어줄 할아버지도 우리 밭도 지금은 사라져버렸다. 그러니 해마다 가을이면 고구마를 사서 먹는다. 양면팬에 대여섯 개 넣고 약한 가스 불에 올려놓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온 집안에 할아버지가 아궁이에서 군불 지피며 구워주시던 군고구마의 녹진한 단내가 번진다. 얼른 가스 불을 끄고 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낸다. 고구마와 가장 잘 맞는 음식이 약간 신 김치니까 말이다.

겨울이면 가끔 고구마로 한 끼를 채운다. 잘 익은 고구마를 집으면 옛 기억이 손으로 전해져 온다. 노란 김이 몰캉하니 입안에 퍼지며 뜨듯한 기운이 온 몸으로 번져간다. 배꼽 밑이 따뜻하게 데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