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록강은 흐른다(이미륵)에 부쳐

공자는 화려한 옷차림을 한 자로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원래 양자강은 민산(岷山)에서 시작되는데 그것이 처음 시작할 때는 겨우 술잔을 띄울만한 정도(濫觴)였다. 그러나 이 물이 강나루에 와 닿았을 때는 큰 배를 띄우고 바람을 피하지 않고는 건널 수 없다. 그것은 하류의 물이 많기 때문에 사람들이 겁이 나서 그러는 것이다. 지금 너는 화려한 옷을 입고, 몹시 만족해하는 얼굴을 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너의 이와같은 태도를 보게 될 때 누가 너를 위해 좋은 충고를 해 줄 사람이 있겠느냐.” ‘사물의 맨 처음’으로 풀이되는 남상(濫觴)이라는 말은 여기에서 나온 말이다.
공자는 화려한 옷차림을 한 자로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원래 양자강은 민산(岷山)에서 시작되는데 그것이 처음 시작할 때는 겨우 술잔을 띄울만한 정도(濫觴)였다. 그러나 이 물이 강나루에 와 닿았을 때는 큰 배를 띄우고 바람을 피하지 않고는 건널 수 없다. 그것은 하류의 물이 많기 때문에 사람들이 겁이 나서 그러는 것이다. 지금 너는 화려한 옷을 입고, 몹시 만족해하는 얼굴을 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너의 이와같은 태도를 보게 될 때 누가 너를 위해 좋은 충고를 해 줄 사람이 있겠느냐.” ‘사물의 맨 처음’으로 풀이되는 남상(濫觴)이라는 말은 여기에서 나온 말이다.

가정방문을 오신 담임선생님은 하늘과 가까운 동네라며 웃으셨다. 우리 집은 내가 고등학교를 다니느라 읍내에서 자취를 할 때도 대학을 다닐 때에도 그리고 지금도,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밤에도 불이 꺼지지 않는 서울이, 눈이 오면 우산을 쓰고 종종걸음 치는 이 바쁜 서울의 삶이 낯설어질 때 나는 집으로 돌아와 군불을 활활 지피고 등을 지지며 동면에 든 짐승처럼 오래도록 칩거한다.

돌아가고 싶을 때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나와 달리 미륵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다. (‘압록강은 흐른다’를 읽으며 이미륵 선생이 오래 알고 지낸 사이처럼 느껴졌다.) 그는 3·1운동에 가담한 후 일본 경찰을 피해 독일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이런 그의 삶이 불행하기만 했던 것은 아닌데 이학박사 학위를 받고 뮌헨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던 이력을 통해서 이를 짐작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 책에서 느낄 수 있는 그의 따뜻한 성격, 사람과 사물에 대한 관심과 애착, 이런 품성은 그를 빛나게 만들었을 것이고 그 빛은 그의 주변 사람들까지 물들였을 것이다.

그의 글을 읽노라면 ‘르’를 발음하지 못해 ‘미륵’을 ‘미악’이라 부르는 사촌 ‘수암’의 부드러운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그가 자주 사용하는 ‘고상하다’라는 단어처럼 그의 글은 고결하고 상서롭다. “압록강은 흐른다”는 독일어로 출간되어 우리말로 옮겨졌지만 미륵의 글무늬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이는 역자의 섬세함에서 비롯하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역자가 미륵의 글법에 자신도 모르게 스며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가느다란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려 신기하고 어려운 글자”를 적시듯이 그렇게 말이다(11면).

이런 문채(文彩)는 독일인에게 생소했을 조선의 삶을 실어 날랐을 것이다. 독일인들은 미륵의 정갈하고 고요한 글쓰기를 통해 조선을 여리고 가냘프며 아름답고 애잔한 곳으로 생각하며 연민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조선을 인식하는 이러한 방식은, 에드워드 사이드가 비판해 마지않았던 오리엔탈리즘이다. 하지만 오리엔탈리즘이 갖는 무수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인간의 인식론적 한계의 단적인 사례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오리엔탈리즘이란 일종의 선입견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호기심과 앎은 하나의 선입견에서 시작하며 그것을 교정해 나가는 과정을 거듭하며 하나의 인식으로 자리 잡는다. 편견이 없다면 우리는 대상에 다가갈 수 없다. 따라서 문제적인 것은 편견 자체가 아니라 이러한 편견을 고수하는 태도다. 독일인들은 미륵의 글을 읽으며 조선에 대해서 생각했을 것이고, 나아가서는 더욱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조선에 대해 공부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작고 볼품없는 나라가 아니라 미륵이 사는 아름다운 나라로 인식하게 되었을 것이다.

정작 미륵 스스로는 원자, 이온 에너지와같은 말을 이해하려고 무던히 애를 썼고, 그 산란한 서구의 학문을 피해 송림 마을 외딴 포구에서 요양을 하였다. 요양을 끝내고 돌아와서는 라디오 강의록을 통해 신학문을 수년 동안 공부하였고, 독일어를 익히기 위해 “눈이 피로하여 글자를 알아볼 수 없을 때까지 읽고는 생각하고 또 읽고는 생각”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250면).

이런 지난한 과정을 그치며 그는 유럽의 삶을 체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 사람이 자신의 문화권을 떠나 다른 문화에 동화되기까지 이런 지난한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미륵은 알고 있었던 것같다. 그래서 그는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을 삼가고 있는 듯하다.

아궁이, 마루, 떡장수와 같은 일상어는 물론 권주가, 소동파, 도연명, 한방의술 등의 문화에 대해서도 알 리 없는 이 낯선 땅에서, 미륵은 이런 단어들을 설명하려 조바심내지 않는다. 한자는 ‘신기하고 어려운 글자’, 한옥은 ‘원형으로 지어진 집채’, 무당은 ‘소리와 춤으로 귀신을 불러들이는’사람, 붓 잡는 방식은 ‘청소부가 총채를 쥐듯이’처럼 최소한의 말로 언어의 핵심에 가닿는다.

정갈하고 품위있는 문장은 사람을 감응시키며, 작은 것을 통해 전체를 드러내는 방식은 호기심을 자극한다. 독일인들은 미륵의 글을 읽으며 조선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고, 그가 설명하지 않은 부분을 스스로 채우며 조선을 더욱 깊이 알아갔을 것이다. 출간 당시의 뜨거운 반응이나 중등 교과서에 실릴 수 있었던 것 역시 이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네가 여기 살아서 언제나 나와 같이 음악을 즐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니? 너는 일을 안 해도 좋고, 걱정을 안 해도 되며 행복한 사람으로 평생을 살아도 되지 않니? 네가 원하기만 하면 동무들을 불러다 하늘이며 땅이며 세계며 사람들의 마음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니? 너는 산에다가 집을 한 채 짓게 하여 시냇물 흐르는 소리를 듣고 흘러가는 구름을 볼 수 있지 않니? 너의 어머니는 행복할 것이고, 너도 행복하게 살 것이며, 또 나는 언제나 네 곁에 있을 수 있지 않겠니?”(172면)

이것은 국악에 심취한 만수가 서울로 떠나려는 미륵을 만류하면서 했던 말이다. 이 말은 고풍스럽고 고혹적이어서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답다. 그런데 여기에는 거문고의 명수 백아와 관포의 사귐, 조선시대 선비들의 풍류와 노장사상이 담겨 있다. 이런 지식이 글을 더욱 깊이 음미할 수 있게 만들지만, 설사 모를지라도 어떤 떨림을 느끼긴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그의 글이 흔들어 놓은 것은 누구보다 미륵 자신이 아니었을까. 미륵은 그리움에 휩쓸려 감정을 휘발시키기보다는 자신의 삶을 오래도록 새김질하여 그리움을 복원해낸다. 이 오랜 새김질 덕분에 우리도 그의 둥근 슬픔을 공감하게 된다. 아버지와 함께 누워 소동파와 ‘영탄가’를 읊었고, 기섭, 용마, 만수가 배웅을 나오고 어머니가 “너는 다시 이 에미한테로 돌아왔구나”라며 맞아주었던 일(251면), 또 그의 누이가 “너는 달빛 아래서 술잔을 기울이며 시를 지을 수 있게 거기(유럽)에도 남풍이 불어준다고 믿니?”라고 타박을 주었더라도(110면), “파괴된 성벽과 헐어버린 문간이 형용할 수 없는” 슬픔을 느끼게 하였더라도(130면), 이런 기억은 미륵에게 소중했을 것인데, 우리 역시 그와 함께 이 모든 것들을 추억하게 된다.

공강일서울대 강사·국문학
공강일서울대 강사·국문학

독일 독자들을 향한 글이었음에도 그는 낯선 조선의 삶을 구차하게 설명하는 법이 없다. 조선에 대한 그리움을 구구히 토로하지도 않는다. 때론 말없는 말이 더 많은 것을 말하곤 한다. 이 침묵을 따라가다 보면 조선을 떠나야 했던 또 다른 미륵들, 당대를 견뎌내야 했던 미륵들, 그 숱한 미륵들의 삶에까지 이르게 된다.

* ‘압록강은 흐른다’는 1946년 독일에서 발표된 한국 소설이다. 저자 이미륵은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기 전의 어린 시절부터, 경성의학전문학교를 다니다 3·1운동에 가담한 후 독일로 망명하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자전적 소설이다. 이 글은 제1회 한민족 이산문학 독후감대회에서 수상한 작품을 수정하였음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