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편의 시 하나의 풍경
라오스와 이시영 시인

▲ 메콩강이 넘실대는 남부 라오스의 풍광. 아름답고 쓸쓸하다.
▲ 메콩강이 넘실대는 남부 라오스의 풍광. 아름답고 쓸쓸하다.

인도차이나 반도 가운데 위치한 라오스는 ‘가난한 사람들의 환한 웃음’과 ‘여행자에게 베푸는 친절’로 기억되는 나라다.

얼마 전부터 TV 여행 프로그램에 자주 소개된 탓에 급속도로 ‘특색 없고 흔한 동남아 관광지’로 변해가고 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문명의 때가 덜 묻고, 영악한 장사치들의 속임수가 비교적 덜한 곳.

라오스를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수도인 비엔티안에서 여행을 시작해 ‘작은 유럽’으로 불리는 강변마을 방비엔을 거쳐, 불교 유적이 매혹하는 루앙프라방을 향해 가는 북쪽 코스를 선호한다.

조금 더 모험심을 발휘한다면 낯선 원시의 향기가 곳곳에 산재한 라오스 남부 팍세, 시판돈, 사완나켓을 둘러볼 수도 있다. 젊은이들은 이 루트도 곧잘 선택한다. 영어를 못하는 이들조차 길을 묻는 외국인에게 손짓에 발짓까지 동원해 목적지를 알려주려 애쓰는 라오스 사람들.

담배와 맥주를 사러 들어간 구멍가게의 주인 할머니는 “여기까지 왔으니 저녁을 함께 먹자”며 생전 처음 보는 기자를 자기 식구들이 둘러앉은 방으로 밀어 넣기도 했다. 한국의 1970년대와 같은 인심이 있는 나라였다. 너나없이 가진 그들의 따스함이 좋았다.

정님이 - 이시영

용산 역전 늦은 밤거리
내 팔을 끌다 화들짝 손을 놓고 사라진 여인
운동회 때마다 동네 대항 릴레이에서
늘 일등을 하여 밥솥을 타던
정님이 누나가 아닐는지 몰라
이마의 흉터를 가린 긴 머리, 날랜 발
학교도 못 다녔으면서
운동회 때만 되면 나보다 더 좋아라 좋아라
머슴 만득이 지게에서 점심을 빼앗아 이고 달려오던 누나
수수밭을 매다가도 새를 보다가도 나만 보면
흙 묻은 손으로 달려와 청색 책보를
단단히 동여매 주던 소녀
콩깍지를 털어 주며 맛있니 맛있니
하늘을 보고 웃던 하이얀 목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지만
슬프지 않다고 잡았던 메뚜기를 날리며 말했다.
어느 해 봄엔 높은 산으로 나물 캐러 갔다가
산뱀에 허벅지를 물려 이웃 처녀들에게 업혀 와서도
머리맡으로 내 손을 찾아 산다래를 쥐여 주더니
왜 가 버렸는지 몰라
목화를 따고 물레를 잣고
여름밤이 오면 하얀 무릎 위에
정성껏 삼을 삼더니
동지섣달 긴긴 밤 베틀에 고개 숙여
달그랑잘그랑 무명을 잘도 짜더니
왜 바람처럼 가 버렸는지 몰라
빈 정지 문 열면 서글서글한 눈망울로
이내 달려 나올 것만 같더니
한 번 가 왜 다시 오지 않았는지 몰라
식모 산다는 소문도 들렸고
방직공장에 취직했다는 말도 들렸고
영등포 색시집에서
누나를 보았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어머니는 끝내 대답이 없었다.
용산 역전 밤 열한시 반
통금에 쫓기던 내 팔 붙잡다
날랜 발, 밤거리로 사라진 여인.

▲ 방비엔 재래시장 쌀국수집에서 만난 남매

라오스를 처음 찾았던 몇 해 전이다. 프랑스와 독일, 네덜란드와 영국에서 온 유럽 청년들이 마을 전체를 점령하다시피 한 방비엔에서 나흘을 머물렀다.

조그만 보트를 타고 강 위를 떠다니거나, 투명한 물빛의 연못에서 종일 수영하는 것도 지겨워질 무렵. 낡은 오토바이를 빌려 타고 재래시장을 찾았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커다란 민물 생선과 밀림에서 잡은 도마뱀 따위를 구경하는 재미가 만만찮았다. 어린 시절 엄마 손을 잡고 찾았던 오일장의 기억이 떠올랐다.

지친 다리도 쉴 겸 쌀국수를 파는 좌판에 앉았다. 한 그릇에 우리 돈으로 500원 정도. 양이 적었지만 국물 맛은 나쁘지 않았다. 그때 옆에 앉은 누나와 남동생이 눈에 들어왔다. 누나라고 해봐야 열네댓이나 됐을까? 그런데 겨우 쌀국수 하나를 시켜놓고 대여섯 살로 보이는 동생의 입에만 그걸 넣어주고 있다. 자기는 전혀 먹지 않고.

그랬다. 40~50년 전이라면 한국에서도 흔했을 풍경. 시인 이시영(69)의 절창 ‘정님이’가 눈앞으로 영화 자막처럼 흘러갔다.
 

▲ 라오스 재래시장 노점의 쌀국수. 이 소박한 한 끼가 가난했던 우리의 지난 시절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 라오스 재래시장 노점의 쌀국수. 이 소박한 한 끼가 가난했던 우리의 지난 시절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 우리들 사이엔 있던 ‘정님이 누나’는 어디로…

농경사회의 붕괴와 도시의 산업화가 동시에 진행되던 한국의 1960~70년대. 시골마을에서 남의 집 부엌일 등을 돌봐주며 살았던 10대 여성들이 대거 도시를 향했다.

학력이 높지 않았고, 든든한 배경 또한 없었던 그들 중 상당수는 낮은 임금을 받으며 노동집약적 산업현장에서 혹사당했다.

그런 힘든 상황이었으니 몇몇은 “쉽게 돈을 벌 수 있다”는 유혹에 넘어가 술집을 찾기도 했다.

대부분의 국민들이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시절의 아픈 역사다. 이시영의 시에 등장하는 ‘정님이’ 누나 역시 그랬을 것이다.

‘학교를 다녀보지 못했음에도 운동회 때면 누구보다 기뻐했고’ ‘산나물 캐고, 물레를 잣고, 목화를 따던’ 순박한 처녀 정님이는 “나도 남들처럼 살아보겠다”는 독한 결심을 하고 도시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을 터. 하지만 각박한 세상은 물정 모르는 어린 여성에게 쉽게 행복을 허락하지 않는 법. 풀풀 먼지 날리는 방직 공장에도 다녀보고, 주인아주머니가 호랑이처럼 무서운 부잣집의 식모로도 일했지만 형편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정님이 누나는 영등포 술집 여급이 된 것일까? ‘정님이’라는 시는 우리의 과거를 아프게 돌아보게 한다. 가난이란 죄가 아니지만, 결코 아름다울 수 없다. 그렇지 않은가?

▲ 누이들과 ‘더불어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을 향해

그날 기자가 방비엔 재래시장에서 본 누나와 동생의 모습. 얼마 되지 않는 면발과 국물을 동생 입에만 넣어주던 ‘라오스 누나’와 반세기 전 한국의 ‘정님이 누나’는 지독하게도 닮아 있었다. 시골마을 허름한 재래시장 좌판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던 착하디착해서 눈물겨운 누이들.

라오스를 다녀온 몇 주 뒤. 아래와 같은 졸시를 쓴 것은 ‘아픔과 가난의 시대’를 온전히 자신의 몸으로 버텨냈던 ‘누이들’을 향한 미안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누이 하나 가지고 싶었다

어깨 둥글고
턱선 고운
누이 하나 가지고 싶었다

멀건 멸치국물 국수 보며도
제 허기보다
버짐 핀 사내동생 먼저 떠올리는
물 낡은 나일론치마
단발머리 계집아이

야물고 새침한 눈매
앙다문 빨간 입술로
읍내 건달 휘파람 잠재우던
서슬 푸른 치마
바로 그 치마 걷어 올려
김 오르는 가래떡 같은 종아리로
동짓달 찬 내 건너며
업힌 코흘리개 달래는
나눗셈 서툰 열여섯

파락호 아버지 술주정에
열두 살 많은 새어머니 박대
노망 난 할머니 요강 수발에도
달랑대는 막내 고추만 보면 웃던

어깨 둥글고
턱선 고운
누이 하나 가지고 싶었다.

다행히 한국사회가 변하고 있다.

그 변화의 과정 속에서 차별의 고통을 겪어야 했던 ‘누나들’이 차츰 줄어들고 있다는 건 재론의 여지없이 반가운 일이다. 동생과 함께 자신 또한 소중하게 생각하는 누이들이 앞으로는 더 많아져야 한다.

그건 세상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증거가 될 것이기에. 라오스도 마찬가지다. 방비엔 재래시장 노점에서 남동생에게 쌀국수를 먹이던 누나가 누구보다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이 소박하지만 간절한 바람은 언제쯤 이뤄질까.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사진제공/류태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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