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작나무숲. 숲속에서 우리는 될 수 있으면 귀를 기울이는 것이 좋다. 바람이 허공을 밟고 지나가다 삭정이를 밟는 소리, 물이 돌을 돌아 흐르는 소리, 그리고 이름 모를 새의 소리들. 이러한 소리는 모두 공기의 떨림이다.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이런 미세한 공기의 떨림을 느끼며 공명하는 일이다.
▲ 자작나무숲. 숲속에서 우리는 될 수 있으면 귀를 기울이는 것이 좋다. 바람이 허공을 밟고 지나가다 삭정이를 밟는 소리, 물이 돌을 돌아 흐르는 소리, 그리고 이름 모를 새의 소리들. 이러한 소리는 모두 공기의 떨림이다.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이런 미세한 공기의 떨림을 느끼며 공명하는 일이다.

1.

“커서 뭐가 될래?”

이 말을 다시 듣게 된 것은 20대 후반이었다. 그때 나는 대학을 졸업한 후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방황하고 있었다.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할 수 없었고 번번이 대학원 진학에 실패했다. 무엇을 하는지도 모른 채 삶은 조금씩 닳아가고 있었으며 그 속에서 나는 형체도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하루는 친형처럼 따르던 동네 형과 어울려 술을 마신 일이 있다. 술을 따르던 친구가 술병을 놓치는 실수를 했다. 재치있는 형은 동네 어르신이 개구쟁이들에게 한심스럽다는 듯이 던지는 말투로, “으이그, 커서 뭐가 될라카노?”

이 말이 너무 재미있게 들렸다. 우리는 더 이상 자랄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고, 우리는 저마다 이미 무엇인가가 되어 있었거나 되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다 컸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실제로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래서 ‘커서 뭐가 될래’라는 말이 우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래서 더 재밌어했는지도 모르겠다. 이 말은 그날 술자리에서 가장 인기있는 말이 되었다. 우리는 툭하면, 커서 뭐가 될래,를 서로에게 해댔다.

그런데 이 말은 특히 나에게 각별하게 다가왔다. 그도 그럴 것이 친구들은 모두 직장이 있었고 연애를 하거나 결혼을 했거나 집이나 차를 가지고 있었고 저마다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보였다. 그에 반해 나는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내 삶이 실패했고, 내 삶은 이미 끝난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삶을 결코 살 수 없을 것이라는 자괴감에 빠져 있었다. 다른 친구들처럼 살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에게 커서 뭐가 될래, 라는 말은 클 수 없음에 대한 반어가 아니었다. 이 말은 이 말 그대로, 그 지시성 그대로가 진실이었고, 진실이길 간절히 바랐다.

2.

그 후 많은 시간이 흘렀으나 내 삶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여전히 나는 가난하고 외롭고 지치고 힘겹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커서 뭐가 될래, 라는 말을 믿고 있다. 나는 여전히 무엇이 되고 싶다는 꿈을 버리지 않았다. 이 말을 믿기 전에 나는 선생이든, 교수든, 시인이든, 남편이든, 아빠든, 여하튼 그 무엇인가이고 싶었다. 안정적인 직장을 갖지는 못하더라도 사람들에게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의 사람이고 싶었다.

그러나 커서 뭐가 될래, 라는 말을 통해 이런 강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커서 뭐가 될래, 라는 말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의 자리를 ‘무엇’으로만 남겨두는 일이다. 무엇을 ‘무엇’으로 버려둔다는 것은 ‘무엇’의 자리를 무엇으로도 바꾸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지젝은 한 강연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줬다. 그 이야기는 이렇다. 아주 힘들고 곤란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지금 상황이 어두운 것같지만 늘 터널 끝에는 빛이 있어. 그러니까 용기를 잃지마.”라고 말한다. 이런 말에 동유럽 출신인 지젝과 같은 공산주의자들은 아주 냉소적으로 대꾸한다고 한다. “물론 그렇지 우리를 향해 기차가 달려오고 있으니까.”

희망은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고 좌절하고 체념하라는 말은 아니다. 절망만이 길일지라도 그 절망이 정확히 무엇인지 말해야 하고 그 절망에 대해 사유해야 한다. 망가진 잠수함 속에서 산소는 떨어져가고 사람들은 잠들어 있고, 그들을 깨운다고 해도 문을 열 수 없고, 설사 문을 열더라도 바닷 속이니 상황만 악화될 테지만 그래도 사람들을 깨워야 한다. 그로 인해 절망과 혼란이 가중된다 할지라도 그들을 깨워야 한다. 이 절망과 혼란 속에서 분열, 이것이 어쩌면 삶의 실체인지도 모른다.

3.

나는 삶이 방향성없는 방향들의 분열이라고 생각한다. 더 정확히는 분열된 틈에서의 떨림이다. 이 말은 우리가 남자와 여자의 사이에서 태어나야 한다는 것,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증명 가능하다. 아이들은 아빠와 엄마라는 분열된 틈에서 태어나 자라는 동안 끝없이 떨린다.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라는 말에 아이들이 선뜻 대답할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떨림이 체화된 아이들, 분열이 체화된 아이들은 아빠와 엄마라는 분열된 틈에서 떨리고 있다.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라는 말에 아이들이 선뜻 대답할 수 없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아빠를 49% 좋아하고 엄마를 51% 좋아하기 때문에 혹은 그 반대이기 때문에 말을 못할 수도 있다. 그런데 아빠를 2% 좋아하고 엄마를 98%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아이들은 쉽사리 엄마를 더 좋아한다고 말하지는 못할 것이다. 2% 좋아하는 것도 좋아하는 것이니까. 그러면 둘 다 좋아라고 말하면 그만일 것이나, 아이들은 여전히 머뭇거리기 일쑤다. 엄마를 98% 좋아하더라도 남은 2%마저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아이가 엄마를 좋아하는 것도 진실이지만 안 좋아하는 것도 진실이다. 더욱이 이 좋아함의 정도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하기 마련이다. 살다보면 엄마보다 아빠가 더 좋을 때도 있는 법. 그러니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라는 말 앞에서 아이들의 머뭇거림은 당연하지 않은가. 적어도 나는 이 분열의 틈에서 떨리고 있다. 나는 엄마를 좋은 엄마와 안 좋은 엄마로 분열시키고, 그 분열 사이에서 끊임없이 진동하고 있는 셈이다. 만약 내가 엄마를 좋은 엄마로 규정해버린다면 나의 분열은 물론 엄마의 분열도 멈출 것이다. 더 이상 분열하지 않는다면 엄마도 나도 늙어가고 말 것이다. 왜? 분열은 곧 성장이며, 분열을 멈춘다는 것은 노화이므로….

4.

▲ 공강일서울대 강사·국문학
▲ 공강일서울대 강사·국문학

그러니 믿어주기 바란다. 나는 여전히 자라고 있다. 사회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말이다. 실제로 나는 자라고 있다. 사회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말이다. 나의 세포는 여전히 분열하고 있으며, 나와 더불어 세상도 분열해 가고 있다는 것을 믿어주기 바란다. 분열의 방향은 없으며, 방향성없는 방향으로 분열하고 있다. 그러니 믿어주기 바란다. 삶은 방향성없는 방향들의 분열이라는 것을.

더 클 수 있다는 것은 결국 그 너울거림을 긍정하는 일일 것이다. 어떤 것에 안착하거나 규정되지 않은 채 끊임없이 떨리는 것도 삶일 것이다. 나는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되지 않을 것이고, 남편이나 아빠도 되지 않을 것이며, 과장이나 교수도 되지 않을 것이다. 넌 뭐하고 사냐, 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당당히 ‘뭐’하고 삽니다, 라고 말할 것이다. 특정한 일이 없이 ‘무엇’을 하고 있는 나를 부질없는 인간, 쓸모없는 인간, 그런 류의 인간으로 부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삶과 더불어 너울거리며 온 힘을 다해 내 삶을 탕진하며 살아갈 것이다. 다함이 없는 떨림 속에서 나는 영원히 삶을 탕진하며 영원히 떨릴 것이다. 하여 “커서 뭐가 될래”를 믿는다는 말은 불사(不死)를 믿는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나는 이 말과 더불어 영원히 살아갈 것이다.

그러니 물어주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