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준섭변호사
▲ 박준섭 변호사

독일의 직업을 이야기할 때 루터는 중요하다. 루터는 중세의 끝자락에 종교개혁을 통해 헤라클레스가 돼 세속화라는 근대로의 문을 열어젖혔다. 루터는 ‘모든 사람이 사제’라는 만인사제설을 주장하면서 인간이 하는 모든 직무나 일은 신학적으로 동등한 가치를 가진다고 했다. 그때까지 중세의 사회질서는 이중적 계급으로 영적 신분인 사제계급과 세속적 신분인 평신도로 구분됐다. 그러나 루터는 두 왕국이론을 가지고 종교권인 교황권으로부터 세속적 영역을 분화시켰다. 세 신분론을 주장하면서 세속적 영역인 정치적 영역과 세속적으로 노동하고 생산하는 경제적 신분을 분화시켰다. 세속적·경제적 신분은 다시 다양한 직업으로 분화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루터가 말하는 직업은 Beruf(소명)가 됐다. 이를 번역하면 ‘신의 부름’이라는 뜻이다. 곧 직업은 신이 불러 맡긴 성스러운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독일에서는 세속화 과정을 거치면서 점차로 종교적 색채가 소멸했기 때문에 현대에 직업을 선택하고 거기에 헌신하고 그를 통해 자아를 실현하고 삶의 의미를 찾는 개인의 문제가 됐다. 하지만, 현대에도 여전히 모든 직업이 고귀한 것이라는 명제는 남아 있다.

독일은 근대화의 과정에서 직업에 빌둥(Bildung)이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빌둥에는 참된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괴테가 쓴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라는 소설을 보면, 청년 빌헬름이 성장해 나가는 이야기를 통해 빌둥의 개념을 이해할 수 있다. 주인공 빌헬름은 유복한 상인의 아들이었으나 연극에 빠져 유랑극단을 따라간다. 이것을 계기로 넓은 세상에 던져진 채 갖가지 인간관계에 휩쓸리게 되고 많은 실패를 거듭하면서 인생의 여러 가지 모습을 경험하게 된다. 괴테는 이 실패의 과정을 통해 빌헬름이 한사람의 주체적 인간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참된 인간이 되는 길, 이 과정이 빌둥이다. 이후 빌둥은 헤겔, 훔볼트, 하이데거 등을 거치면서 독일교육철학의 핵심이 됐다.

이런 역사적·철학적 기반을 가진 독일사회는 사회의 구조의 면에서 우리와 선명한 차이가 난다. 가장 큰 차이점은 독일에서는 한 개인이 어떤 직업교육과정을 선택하더라도 지속 가능한 삶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지속 가능한 삶이란 독일 학생이 직업교육학교를 졸업하고 직업 훈련을 거쳐 직업을 가진다고 가정했을 때, 자신의 소득으로 평생 안정적인 생활이 가능하고 사회적 지위에서도 존중을 받는다는 의미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개인이 직업교육을 받고 중소기업에 취직해서 안정적인 삶을 꿈꿀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사회적 인식도 좋지 않고, 불안한 고용 환경과 저임금 문제와 중소기업 사업장의 작업환경 자체가 좋지 않다. 우리가 실업계고를 기피하고 인문계고로 진학하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국 사회의 절대적인 인문계 선호는 이런 사회·경제적 구조를 따져 보았을 때는 학부모의 합리적인 선택에 따른 것이라 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에서 독일의 마이스터 제도를 차용한 마이스터고가 현재 성공적이지 못한 이유는 이런 역사적·철학적·사회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제도만 가져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독일의 교육철학의 형성과정을 통해 두 가지를 배울 수 있다. 하나는 마이스터고 제도를 제대로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마이스터고를 졸업하고 직업인이 되더라도 사회에서 계층적 차별이 없고 정상적인 경제적·문화적 생활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둘째는 마이스터고를 졸업한 직업인이 그 직업을 통해 성장과정을 거치면서 궁극적으로는 경제,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인격의 완성에 이를 수 있도록 사회적·제도적 기반을 마련해 줘야 한다. 이것이 실현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전근대에 있었던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적 차별로부터 자유로운 직업제도와 교육제도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