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비엔나에 두 번 가본 적 있다. 유럽을 간다면 파리나 런던쯤은 가봐야 갔다 왔다고 할 수 있건만, 그런 곳은 못 가봤고 비엔나만 두번.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국의 수도였던 비엔나는 우리 귀에 익은 비엔나 모더니즘의 수도. 그리고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실레가 있다. 클림트의 농익은 사랑의 화폭, 에곤 실레의 비참, 비극적인 육체. 이런 것들을 보는 재미가 좋았다.

색채미 뛰어난 비엔나는 전철을 타봐야 얼마나 화려한지 알 수 있다. 빨갛고, 노랗고, 파란, 유럽식의 시원스러운 직선미에 색채의 화려함이 더해지고, 거기에 다시 금발의 오스트리아 사람들이 살아 움직여, 비엔나는 여름이면 이글이글 타오르는 것 같다.

여행의 목적 자체가 비엔나 모더니즘을 견학하는 것이었고 여기에는 ‘경성 모더니즘’이라는 개념에 대한 욕구가 작용하고 있었다.

장려하고도 웅숭 깊은 예술의식의 본 고장. 프로이트와 비트겐슈타인의 고장이기도 하고, 문학 쪽은 덜 알려지기는 했어도 호프만슈탈이니 ‘밤의 노벨레’를 썼고 평생 쉬지 않고 일기를 썼다는 그 누구더라? 하는 작가도 있고,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 같은 건축가를 비롯 기라성 같은 사람들이 웅거했던 곳이다.

이 비엔나 ‘한가운데’에 무목(MUMOK)이라는 공간이 있다. 미술 전시를 중심으로 시대와 장르가 다른 서너 개의 전시관을 한데 묶어 언제라도 동시대와 지나간 미술의 쟁점을 실감할 수 있게 한다.

바로 거기서 키스 해링(1958~1990)을 만났다. 살아 있는 키스 해링은 아니었다. 그는 퍼포먼스 영상 속에서 어떤 방 하나 그득히 ‘똑같은’ 형태의 ‘낙서’들을 발디딜 틈없이 그려놓고 있었다. 지금 우리는 어디서나 키스 해링을 만날 수 있지만, 나는 거기서 처음으로 그를 만난 것이었다.

모든 천재는 일찍 죽어야 한다. 비디오 화면 속에서 키스 해링은 머리카락을 다 밀어냈고 발가벗고 있었다. 아, 팬티는 입고 있었던가?

‘무목’에서 나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사이에 비엔나가 온갖 그래피티의 전시장임을 깨달았다. 미술 전시장만 예술이 있는게 아니요 도시 전체가 살아있는 전시들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견문 좁은 자의 소견이기는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살아 있는 키스 해링들이었다.

두번 비엔나에 가서 얻은 하나의 명제. “마르크시스트는 정치를 바꾸어 경제를 바꾸고 그것으로 삶을 뒤바꾸려 한다. 그러나 모더니스트는 삶의 환경을 바꾸어 삶을 뒤바꾸려 한다.”

 

무슨 얘기냐.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 전시는 그가 거대 건축물만 아니라 스푼, 포크까지 ‘설계’한 사람임을 알려 주고 있었다. 키스 해링은 삶과 미술을 가장 가깝게 근접시킨 ‘화가’였고, 자신의 ‘낙서’로 삶의 배경들을 물들여 삶 자체도 변전시키려 했다. 그의 그림들은 곧 삶의 혁명의 도구였다.

키스 해링 탄생 60주년. 그의 작품들이 이 땅을 찾아온 모양이다. 한 갑자 이전에 태어났으니 ‘제작 연식’이 꽤나 되었건만 그는 여전히 가장 새로운 전위요, 반항가다. 어디 한번 내가 비엔나에서 무엇을 본 건지 가까운 곳에서 확인해 봐야겠다.

/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