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없을 때 나는 이렇게 썼다. “담배도 연기 없는 담배 따위는 피우지 않는 것이 인간이다. 저 불투명한 흰 것들이 나의 폐를 거쳐서 공기 중으로 흩어질 때 비로소 나의 존재가 증명된다. 담배는 일상 속에서 사멸해 가는 나의 존재를 붙잡아 살아 있음을 깨닫게 만든다. 그러므로 담배는 이 세계에 대항하는 나의 무기이자 격검술이다. 흡연은 일상에 저항하는 가장 미약하면서도 가장 집요한 방법이다. 담배 끊기를 강요하는 것은 일상에 대한 저항을 멈추라는 말과 다를 바 없다. 나의 흡연은 나의 과시를 넘어 일상의 혁명을 지향한다. 그러니 금연은 개에게나 줘버려라.”
▲ 철없을 때 나는 이렇게 썼다. “담배도 연기 없는 담배 따위는 피우지 않는 것이 인간이다. 저 불투명한 흰 것들이 나의 폐를 거쳐서 공기 중으로 흩어질 때 비로소 나의 존재가 증명된다. 담배는 일상 속에서 사멸해 가는 나의 존재를 붙잡아 살아 있음을 깨닫게 만든다. 그러므로 담배는 이 세계에 대항하는 나의 무기이자 격검술이다. 흡연은 일상에 저항하는 가장 미약하면서도 가장 집요한 방법이다. 담배 끊기를 강요하는 것은 일상에 대한 저항을 멈추라는 말과 다를 바 없다. 나의 흡연은 나의 과시를 넘어 일상의 혁명을 지향한다. 그러니 금연은 개에게나 줘버려라.”

담배를 처음 피워본 것은 중학교 3학년 때였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나를 친구들은 의아하게 생각하곤 했다. 그래서 한 대쯤 피워줬다.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중학교 2학년 흡연예방캠프를 하면서 거기에서 보여준 사진들이 너무 끔찍했었기 때문이다. 나는 사내자식이 쪽팔리게 그 사진들을 보며 눈물을 펑펑 흘렸는데, 그건 담배를 피우고 있는 아버지를 생각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담배를 피우게 될 미래의 나에 대한 이른 애도였는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면 담배를 끊고 싶어 부단히 노력한 것 같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말이다. 부모님이 담배 피우는 것을 그것도 아버지가, 대단한 흡연가였다가 금연을 하신 뒤로 더욱 담배의 무익함을 소리 높여 이야기하셨고, 그래도 담배를 피우는 나에게 경멸적이고 모멸적으로 대하곤 하셨다. 그러면 나도 지지 않고 아버지도 마흔다섯까지는 피우셨으니 저도 그때까지는 피우다가 끊으렵니다, 라고 응수하곤 했다. 그래도 한 편으론 죄송함 때문에 부단히 금연을 계획했다. 금연초도 피워보고, 패치도 사서 붙여보고, 보건소에서 금연침도 맞아봤지만, 의미가 없었다. 금연초 4대 피우고 담배 1대 피우고, 그러다간 결국 담배를 피웠고, 패치를 붙이고 피우면 오히려 핑돌아서 담배를 참았다가 패치를 붙인 뒤에 일부러 담배를 피우곤 했다. 금연침은 누가 봐도 플라시보 효과임이 분명했다.

입대 7일 전에 사귄 여자 친구가 담배 끊길 간절히 원했고, 나 역시 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래저래 6주의 시간은 흘러갔고, 다시 후반기 교육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않고는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자대배치를 받기 전에도 한 번 끊었는데, 막상 자대배치를 받고 나니 고참들이 한 대 필래, 라고 물으면 “예, 알겠습니다.” 소리가 절로 나왔다. 입대 한지 채 1년이 가지 못해서 여자 친구와 헤어졌고, 그래서 안심하고 담배를 피웠고, 연애를 할 때마다 담배를 먼저 끊었지만, 그 짧은 금연의 횟수만큼이나 연애도 짧았다.

그렇게 담배는 끈질기게 이어졌고, 담배를 하루에서 이틀 정도 끊었을 때는 많았지만, 3일째는 꼭 피웠는데, 그 핑 도는 맛이 너무 좋았다. 사실 지금도 그 띵한 맛이 그리워지면 어떡하나 걱정이다. 그래도 나는 행복한 비흡연자니까, 라는 얄팍한 말로 그 유혹을 이겨낼 수 있을까?

재작년부터 작년 여름까지 거의 1년 동안 담배를 끊었다. 이 역시 여자 친구 때문이었는데, 한 번도 담배를 끊으라는 말을 하진 않았지만, 정말이지 그녀에게 잘 보이고 싶었고, 내 삶에서 그녀를 결코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정말이지 거짓말처럼 단호한 의지로 담배를 끊을 수 있었다, 라고 생각한 건 착각이었다.

담배를 피우는 동안 항상 어깨가 결린 듯 아팠는데, 어깨통증이 사라졌고, 왼발에만 굳은살이 잡히고, 심할 때는 그게 갈라지곤 했는데, 담배를 끊고는 그런 것들이 완전히 사라졌다. 뿐만 아니라 하지 정맥류가 심했는데 그 통증도 사라졌고, 무엇보다 운동하는 걸 싫어했는데 담배를 끊은 뒤로는 달리기에 재미를 붙여 일주일에 두세 번은 7km씩 뛰곤 했다. 일이 없는 날은 방구석에 드러누워 늘어지는 걸 좋아했는데 담배를 끊고 나서는 그러고 싶은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렇게 좋았다면서 왜 담배를 다시 피웠냐고? 금방 끊을 수 있을 줄 알았다. 정말 그럴 줄 알았다. 그런데 사실 한 번이라도 피면 결코 다시 금연을 이어가지 못할 거란 걸 알면서도 피웠던 게 사실이다. 금연 6개월째 꿈을 꿈꿨다. 꿈이었는데 꿈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생생했다. 담배 한 개와 라이터를 들고 숲으로 아주 깊은 숲으로 달아나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심지어 나조차 찾을 수 없는 깊은 숲에서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 첫 모금은 맛있기는커녕 메케하고 메슥거려서 담배를 바로 껐는데 나는 다시 금연을 못하리라는 자괴감을 가졌는데, 그 꿈속에서의 자괴감이 거의 2년여가 지난 지금도 깊이 각인되어 있다.

담배를 끊었다 피웠다를 여전히 반복해왔다. 여자 친구를 만날 때면 최대한 안 피우는 모습을 보여줘야 했기 때문에 최대한 자제하려고 애썼다. 그래도 담배를 딱 끊었을 때는 여자 친구와 4시간이든 5시간이든 온전히 말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말하다가도 중간에 핑계를 대고 밖으로 나가곤 한다. 그러면 당연히 이야기는 단절된다. 아니 담배를 피워야겠다는 생각을 할 때부터 그녀의 말은 잘 들리지 않고, 내 생각은 담배를 향해 달려간다. 나는 당신을 만나고 있는 건가, 담배를 만나고 있는 건가? 내가 생각해도 내가 불쌍하다.

그렇긴 하지만 한편으론 멋있다는 생각도 한다. 사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도 한 대 빨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샤워를 하면서 담배를 피우는 버릇을 들인 건 ‘샤인’이라는 영화에서 주인공이 미친 듯 퍼붓는 소나기를 맞으며 담배를 물고 있는 장면이 너무 멋져서이다. 내일 아침에 샤워할 때 담배가 생각나면 어떡하지?

여튼 나는 담배를 끊으려는 핑계를 어떻게든 찾으려고 할 거다. 그런데 말이다. 나는 담배를 참는 것이 아니다. 오늘부터 아니 어제부터 나는 행복한 비흡연자라는 걸 선언했기 때문이다. 군인이 아무리 멋지게 옷을 다려 입고, 다리미로 몇 줄을 잡는다고 해도, 그냥 군인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내가 아무리 좋은 라이터로 설령 듀-퐁으로 불을 붙이고, 한 개비 당 1천달러가 넘는 ‘구르카 블랙 드래곤 시가’를 피운다고 해도 나는 ‘찐따’ 흡연자일 뿐이라는 걸 잘 안다.

나는 행복한 비흡연자지만, 그래도 담배를 피우며 웃고 떠들던, 오른손으로 멋지고 ‘눈깔’을 튕기고, 샤워를 하면서 ‘걱정말아요’를 있는 대로 크게 틀어놓고 담배를 피우던 그때가, 그때가 그리워지면, 어쩌지?

▲ 공강일서울대 강사·국문학
▲ 공강일서울대 강사·국문학

그래 자꾸 자꾸 되뇌어야지. 난 행복한 비흡연자고 담배가 맛있고, 멋있다는 건 다 뻥이라는 걸. 그리고 난 온갖 짓을 다해도 결코 멋져질리 없다는 걸. 그런데 그런 상태에서 담배까지 피우면 정말 최악이라는 걸. 그리고 바보야 담배는 맛있는 게 아니야. 그리고 담배는 스트레스를 더 쌓이게 할 뿐이라는 걸, 지금 담배를 못 피워서 쌓이는 스트레스보다 담배를 피우면서 생기는 스트레스가 훨씬, 훨씬 길다는 걸. 심심해서 담배를 피우는 행위는 심심함이라는 그 고귀한 시간을 방해하는 일이라는 것을, 집중력을 높일 수 있다고? 타이핑을 하면서 담배를 입에 물고 하면 집중도 잘 되고 글도 잘 써진다고? 영화를 너무 많이 봤구나, 야, 담배 찾고, 꺼내고, 불붙이고, 빨고, 재 털고, 또 빨고…. 집중력이 높아진다고? 개 발에 땀나는 소리하신다. ‘증말’.

그냥 나는 중독이라고, 중독이라는 걸 인증해야지. 하지만 중독을 일으키는 작은 니코틴 악마는 매우 약한데 그걸 증폭시키는 건 바로 나라는 걸. ‘나’라는 매우 크고 뚱뚱한 사탄이라는 걸. 내가 스스로 끊임없이 나를, 담배피우는 나를 합리화하려고 애쓴다는 걸. 나는 행복한 금연자로서, 두려운 흡연자에서 해방되어 자신감과 만족감을 되찾고 편안한 일상 속에서 살아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