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병래수필가·시조시인
▲ 김병래수필가·시조시인

다시 12월이다. 달랑 한 장 남은 달력이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를 떠올리게 한다. 무술년 벽두가 엊그제 같은데, 세월이 쏜살같다는 말을 실감한다. 총이 없던 시절에는 시위를 떠난 화살보다 빠른 것은 없었을 터이니 옛 사람들이 최상급의 속도감을 표현한 말인 셈이다. 삶이 덧없고 산 날보다 살 날이 적은 사람일수록 세월에 대한 감회는 더 절실하게 마련이다.

올해 스크랩 해둔 신문을 대강 훑어본다. 매년 이맘때면 한 해를 정리하고 마무리하는 의미로 해오는 연례행사다. 중앙지와 지방지와 지방지를 같이 보다보니 사설과 칼럼 등 필요한 기사들만 모아도 한 달이면 적지 않게 쌓인다. 하루 한 편씩 감상평과 함께 실리는 시(詩)를 모아둔 것만도 시집으로 백여 권이 넘는 분량이다. 이사를 할 때도 사과박스로 몇 박스나 되는 신문 스크랩을 신주단지처럼 가지고 왔다. 아마도 다시는 뒤적여 볼 일이 없을텐데 차마 버리지를 못하는 이유가 뭘까.

사회적 활동이 별로 없었던 세월 동안 나는 주로 신문을 통해 세상을 내다봤다. 시골구석에 묻혀 살면서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온갖 현상들을 날마다 전해들을 수가 있는 게 신문이었다. 한 가지 사안이나 사건에 대해서도 다양한 시각과 논리가 있다는 것, 세상을 보는 안목과 균형감각을 기르는 데 신문만큼 유용한 것이 없었다. 자연과 책에서 습득한 정보와 더불어 내 사유와 식견의 바탕이 되어준 것이 신문의 기사였다.

인간 사회에서 시시각각 발생하는 복잡다단한 사건들에서 우주 삼라만상의 현상에 이르기까지, 왜곡이나 편견이 없는 인식의 체계를 갖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세상의 다양한 측면을 살펴보고 어떤 사건과 현상의 진행과 결말까지를 지켜보는 것으로는 신문만한 것이 없었다. 그러는 동안 자연스럽게 몸에 밴 것이 균형감각이다. 어떤 사안이나 사태에 대해서든 편파적이거나 충동적이고 감상적인 대응보다는 원인과 전말을 미루어 헤아려보는 객관성과 합리성을 가질 수가 있게 된 것이다.

부문별로 철해놓은 신문 스크랩을 뒤적이며 한 해를 돌아본다. 올해 우리나라의 가장 큰 이슈는 남북문제였다. 지난 2월에 열린 평창 동계올림픽에 북한이 선수단과 응원단을 보내면서 급물살을 타게 된 남북 화해 분위기는 두 정상의 판문점 회담에 이어 싱가포르에서 열린 미북 정상회담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그 후 몇 달이 지나도록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북한의 김정은은 핵을 포기하지 않았고, 미국의 트럼프와 유엔은 대북제재를 풀지 않았다. 대한민국의 대통령만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오로지 김정은에 매달리고 있는 실정이다. 그가 왜 그토록 굴욕과 원성까지를 불사하고 김정은에게 ‘올인’하는지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김정은이 과연 핵을 포기할 수 있을까? 이 단계에 와서는 당연히 가져야할 의문이다. 트럼프와 유엔의 경제제재에 견디지 못하고 밖으로 나온 김정은이 왜 핵은 포기를 못하는 걸까? 핵을 포기하면 모든 제재가 풀리고 경제적 지원이 쏟아져 들어갈 텐데 왜 그걸 가로막고 있는 것일까. 대한민국의 대통령과 친북좌파들은 왜 그런 의문을 가지지 않는 걸까?

요즘 확증편향이란 말이 자주 오르내린다. 자기의 주장이나 이념을 관철하려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대로 믿는 경향을 말한다. 지금 대한민국을 장악하고 있는 좌파 이념의 정권과 그에 동조하는 무리들이 노정하고 있는 실상이다. 균형감각을 상실한 정권에 바람직한 결과를 기대할 순 없는 일이다. 무엇을 모르는지를 아는 것이 앎의 근본이라 했거늘 확증편향 무리들은 자신의 무지나 오류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 파탄으로 갈 수 밖에 없다. 좌로 한껏 기울어졌던 민심이 무게중심을 바로잡아가고 있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