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형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
▲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

무소유의 달, 하루 종일 얼어붙는 날, 태양이 북쪽으로 다시 여행을 시작하기 전에 휴식을 취하기 위해 남쪽 집으로 여행을 떠나는 달! 열거한 달의 공통점을 아시겠는지? 이들은 인디언들이 12월을 부르는 말이다.

이런 말들을 볼 때마다 필자는 인디언의 삶이 부러워 그들의 꿈을 꾼다. 경제, 교육 등 어느 것 하나 온전한 것이 없는 상태에서 북쪽 예찬론자, 북쪽 대변인이 되어가는 이 나라 정부의 작태(作態)를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는 답답한 지금은 더 자주 꿈에서 인디언들이 보인다. 우리는 언제 그들의 삶을 배울지?

12월을 부르는 우리말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찾아보다 금방 포기했다. 왜냐하면 너무 인위적이고 생소(生疏)한 말들에 말(言) 멀미가 심하게 났기 때문이다. 12월을 맞이하는 자세는 저마다 다르다. 그런데 12월을 대하는 반응은 비슷하다. 그 반응은 “벌써”라는 단어 안에 함축되어 있다. 정말 벌써다. 2018년도 이제 마지막 장을 남기고 있다. 그 모습이 마치 마지막 잎새 같다. 그 잎새를 보는 사람들의 마음엔 환호와 열정 대신 아쉬움, 서운함이 가득할 뿐이다.

올해도 열심히 산 모든 이들에게 이해인 수녀님의 ‘12월의 엽서’라는 시를 선물하고 싶다. “또 한 해가 가버린다고/한탄하며 우울해 하기보다는/아직 남아 있는 시간들을/고마워하는 마음을/지니게 해 주십시오 // (중략) 진정 오늘밖에 없는 것처럼/시간을 아껴 쓰고/모든 것을 용서하면/그것 자체가 행복일 텐데/이런 행복까지도 미루고 사는/저의 어리석음을 용서하십시오 (후략)”

정말 시인의 언어처럼 “아직 남아 있는 시간들을 고마워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진정 오늘밖에 없는 것처럼” 12월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아쉬움이 커서인지 시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다. 그런데 읽을 때마다 마음에 걸리는 행이 있었다. 그것은 “이런 행복까지 미루고 사는”이라는 부분이었다. 이 부분은 올해 고등학생이 된 제자를 생각나게 했다. “지난 주 수행평가 4개 쳤고, 이번 주 수행평가 6개 있어요. 그리고 그 다음 주는 기말고사에요. 정말 매일 매일이 시험이에요. 이럴 거면 수행평가를 왜 보는지 모르겠어요. 그냥 기말고사로만 끝냈으면 좋겠어요. 왜 해야 되는지도 모르는 수행평가 잔뜩 내줘서 공부할 시간 다 빼앗아 놓고 저희보고 공부하래요. 국어 수행평가에서 1점이 감점되어서 왜 감점되었는지 여쭈어 보니 글 주제가 다른 아이들도 많이 한 거라서 감점시키셨대요. 선생님, 이게 무슨 시험이요. 선생님께 예시답안을 보고 싶다고 말씀드렸다가…!”

아이의 흐느끼는 목소리는 12월 칼바람만큼이나 차가웠다. 필자는 제자들과 통화할 때면 늘 죄인이 된다. 아이들이 묻는 말에 만족할만한 답을 해준 적이 단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늘 생각하게 만든다.

과연 우리 교육의 목표는 무엇인지? 무엇을, 또 누구를 위한 교육인지? 평가의 의미는 무엇인지? 가장 기본적인 이 질문들에 누가 답 좀 해 줬으면 좋겠다.

우리는 지금이라도 수행평가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수행평가의 취지에 대해서는 모두 공감한다. 하지만 교육현실에서 자행되고 있는 수행평가는 당초 취지를 잃어버리고 오로지 평가를 위한 평가로 전락해버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문제는 수행평가가 너무 교사 주관적인 평가가 되었다는 것이다. 문항 자체도 그렇지만, 가장 객관적이어야 할 채점이 전적으로 교사 주관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채점 기준이라는 것이 있지만 그 또한 교사의 주관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이다. 많은 학교에서 수행평가는 지필평가보다 반영비율이 더 높다. 그렇기 때문에 더 공정하게, 또 객관적으로 관리돼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아이들은 말한다, 학교의 12월은 “수행평가의 달”이라고. 필자는 갑자기 궁금해졌다, 논술형 수행평가에 대한 담당 과목 교사의 예시 답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