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성식특집기획부장
▲ 홍성식 특집기획부장

태어나고 싶은 국가와 키워줄 부모를 스스로 선택해 세상에 오는 인간은 없다.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힘없는 나라의 국민’ 혹은, ‘가난한 아버지의 자식’으로 태어날 이들은 없을 것이다.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정해지는 게 국적과 신분이다. 단순히 운에 의해 승부가 결정되는 ‘제비뽑기’ 같은 게 때론 인간의 생을 판가름 한다. 사람의 행과 불행 역시 여기서 시작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최근 예멘에서 한국으로 유입된 난민(難民·정치와 종교 혹은, 인종적 차별과 편견을 이유로 외국으로 탈출한 사람)이 사회적 문제로 떠오른 적이 있다.

“여성을 하등한 존재로 보는 이슬람교도가 대다수인 예멘 남성들이 한국에 정착할 경우 성폭력 등의 범죄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는 우려가 인터넷을 통해 빠른 속도로 번졌고, 이는 “예멘 난민의 망명을 받아주면 안 된다”는 목소리로 변해갔다.

60여 년 전부터 왕당파와 공화파의 갈등으로 시작된 예멘 내전은 아직까지도 종교적 판이성과 경제적 문제 등으로 그 이유를 달리 하며 진행 중이다.

이 죽음과 고통의 역사 속에서 지배층이 선택한 정치 시스템이나 이슬람 내부의 계파 갈등과는 무관함에도 가장 큰 상처를 입은 게 예멘의 평범한 국민들.

이들 중 소수가 자신의 고향을 떠나 다른 나라에 정착하는 것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꿈을 꾸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선택과 꿈은 항상 넘기 힘든 벽을 마주해야 했다. 수난과 아픔 속을 살아온 사람들을 안아줄 국가와 국민은 많지 않았다. “저들이 우리의 일자리를 뺏을 수도 있다” “낯선 이들의 문화를 이해하기 어렵다” “악독한 범죄자가 섞여 있으면 어쩔 것인가”라는 게 난민을 거부하는 대표적인 이유들.

이런 난민 거부 현상은 비단 한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거대한 콘크리트 장벽을 세우고, 거기에 철조망까지 둘러 온두라스를 포함한 남아메리카 난민이 미국에 들어오는 걸 막겠다고 선언했다. 경찰은 물론 군대까지 동원하며. 일상 전체가 마약과 살인, 폭력과 납치 등 강력범죄의 위험 속에 처해 있는 중남미 몇몇 국가들. 그런 환경에서 스스로를 지킬 자신이 없는 사람들이 ‘죄 없는’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남부여대(男負女戴) 걸어서 미국을 향하고 있다는 뉴스가 신문과 방송의 국제면을 도배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들을 지칭하는 단어까지 생겼으니 바로 ‘캐러밴’. 한국인과 미국 사람들이 난민 유입을 반대하는 이유는 비슷하다. 다소 거칠게 표현하면 “나와 가족이 살기도 팍팍한데, 생면부지 멀리서 온 당신들까지 도울 형편이 되지 못 한다”는 것. 야속하게 들리지만 완전히 틀린 말이라고도 할 수 없다. 사실 이런 게 인간의 한계이기도 하고.

몇 해 전 이란을 여행했을 때다. 이스파한 이맘광장(Meidan Emam)에서 싸구려 초콜릿을 파는 행상 여럿과 만났다. 가난한 관광객이 그들 모두에게 초콜릿을 사줄 수는 없는 노릇. 그때 행상 중 하나가 서툰 영어로 말했다. “저 사람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온 난민입니다. 우리 중 가장 가난하니 저 사람의 것을 사주세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 한 구석이 따스해졌다. 그때 떠올린 단어가 연민(憐憫)이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가련하게 여기는 마음은 아이러니하게도 부자가 아닌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 발현되는 경우가 더 많다.

‘한 점의 연민도 없이 고통에 처한 난민’을 대하는 요즘 세태를 볼 때면 그날의 기억이 떠오르는 걸 어쩔 수 없다.

이란의 수도 테헤란. 그 도시 관공서 벽에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은 형제다’라는 문구를 읽었다. 남의 입장에 서서 타자를 동정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진 건 지구 위 생물 중 인간뿐이다. 난민 문제 역시 그런 전제 아래서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 한국이건 미국이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