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여섯 시에 사당역 공용버스 정류장에 모이기는 또 난생 처음이다. 어디를 가길래, 언제 올라오기에 이렇게 일찍 모이나?

담양이다. 담양에 국제학술대회가 있다고, 발표 좀 해야겠다는 소리를 들은 게 한참 되었는데, 그게 오늘이었던 것이다. 네시 반에 일어나 씻고 준비하고 고민 끝에 카카오 택시 불러 사당역으로 씽 달리니 다섯 시 삼십 분이나 되었나.

슬슬 사람들이 올라탄다.

차는 달리고 나는 안에서 좋은 소설을 읽는다. 박미하일이라는 한인 5세 작가의 장편소설 ‘헬렌의 시간’(상상, 2018). 아름다운 소설이다. 헬렌은 소설 속 주인공이 체류했던 에티오피아의 젊은 여성의 이름이다. 식민지 경험을 겪은 그 나라에는 유럽식 이름들도 많단다. 이 소설은 강소월이라는 주인공이 아프리카에 갔다 서울에 돌아와서 이번에는 제주도에 가는 이야기다. 작가는 한국에 대한 자신의 ‘그리움’을 표현하기 위해 온힘을 기울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더라도 안간힘은 아니다. 아름다움에 안간힘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버스는 이제 볕을 담뿍 담은 광주호를 지나 한국가사문학관이라는 곳에 우리를 내려놓는다. 여기서 개회식을 한다나. 가사라면 정극인, 송순, 정철 같은 사람들이 즐겼고, 허난설헌 같은 여성 시인도 쓴 것으로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빼놓지 않고 배우는 문학 장르 가운데 하나. 정철의 ‘사미인곡’, ‘속미인곡’도 좋지만 그것을 충신연주지사라 생각하면 좀 ‘징그러운’ 데가 있고 그보다 ‘관동별곡’은 “강호에 병이 깊어 죽림에 누웠더니 관동 팔백리의 방면을 맡기시니~”로 시작되는 ‘솔직함’에 자연의 묘사와 찬탄이 어우러지는 명편이다.

가사문학을 기념하는 문학관을 마련해 놓은 슬기에 내심 감탄하며 주위 돌아보는데, 보이느니 대나무, 아하, 이곳은 대나무의 고장이다. 죽세공품 유명한 곳이라는 말 어려서부터 수없이 들었는데 오늘에야 이 담양 행차를 했나 보다, 하고 거기 사람들 얘기에 귀를 기울이니 대나무 죽순을 먹으려면 4월에 순 나는 대죽보다 6월에 나는 분죽 죽순을 먹어야 제맛이란다.

점심은 한우 전문집이라는 데서, 하지만 전골 정도로 맛있게 먹고 이제 발표를 하러 전남도립대학으로 간다. 담장 없는 대학은 담양 읍내에 안겨 학교라기보다 차라리 공원 같은 느낌이요, 이 동네 명물 메타세콰이아도 몇 그루 서 있고, 연못에 정자로 갖춘 아담한 곳이다. 발표는 해야 할 사람이 너무 많아 맨 첫 발표를 자청해서 ‘적당히’ 의무를 마감하고, 이제 어떡한다?

중앙일보 문학 전문기자로 일했던 이경철 시인이 버스에 동행을 하셨다. 당신 고향이 바로 이 담양, 못 담자, 볕 양 자, 못에 볕이 가득하여 담양이라 하고, 바로 몇 걸음 걸어가면 ‘관방제림’이라고, 홍수 막으려고 관에서 쌓아놓은 둑에 나무를 심어 놓은 곳 있단다. 산에 단풍 못지 않게 아름답다는 느티나무 늘어선 둑으로 나가, 어떠냐, 막걸리가.

할머니 2대째 국수를 파셨다는 곳에 앉아 드디어 죽순 요리에, 그곳 명물 국수에, 달걀도 여기 달걀은 여느 달걀 아니란다. 냇가에 오후에 앉아 늦은 가을 바람 맞으며 거기 막걸리 한 잔에 죽순 그 부드러운 무침을 한 점 맛보니, 아하, 서울은 여기서 몇 리? 벌써 초겨울 같은 추위인데.

담양, 못에 볕이 가득 담겨 아름답고도 따사롭다. 좋은 곳에 사람이 많지 않으니, 이 또한 시대요, 세상 탓이라 할까.

/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이철진<한국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