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
▲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

나이 들면서 세상과 작별하는 사람의 면면이 눈에 밟히는 경우가 늘어난다. 젊은 시절에는 죽음이 나와는 무관한, 먼 곳에 있는 매우 추상적인 대상으로만 보였다.

그러다가 문득 가까운 사람의 부음이 홀연히 찾아들면 흠칫 놀라게 된다.

그런 놀라움의 순간이 어느새 일상의 한 부분으로 자리를 잡아가는 나이에 이른 것이다. 세월과 시간은 세상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그 점에서 우리는 단 하나의 평등권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이탈리아의 영화감독 베르나르도 베루톨루치가 세상을 버렸다.

1941년에 출생했으니 우리 나이로 78세. 아버지의 친구이자 ‘맘마 로마’를 연출한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의 조감독으로 영화인생을 시작한 그는 1962년 ‘냉혹한 학살자’로 영화감독이 된다. 베르톨루치가 남긴 대표작으로 사람들은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를 거명하곤 한다. 상당한 예설(藝褻)논란을 불러일으킨 말론 브란도와 마리아 슈나이더가 출연한 영화다.

내가 베르톨루치를 떠올리는 까닭은 ‘마지막 황제’ 때문이다. 모택동 사후 10년 동안 이뤄진 중국의 개혁개방과 맞물려 세계적 관심을 집중시킨 영화 ‘마지막 황제’.

영화가 개봉된 1987년에는 ‘패왕별희’의 천개가와 함께 5세대 감독이라 불리는 장예모의 ‘붉은 수수밭’이 제작된다.

그는 ‘국두’ , ‘홍등’ , ‘귀주 이야기’, ‘인생’ 같은 영화로 중국 현대사의 굴곡진 가시밭길을 강렬한 영상과 서사로 선보인다. 장예모와는 다른 색깔과 향기로 베르톨루치는 우리를 20세기 초부터 시작해 부의가 생을 마감하는 1960년대 중반의 중국으로 인도한다. 1908년 3살 꼬마 부의의 황제등극, 1911년 신해혁명, 1912년 청나라 멸망과 더불어 시작된 부의의 파란만장한 인생, 그리고 중국사의 파노라마를 씨줄과 날줄로 엮어낸 ‘마지막 황제’. 단출한 서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장인 베르톨루치의 저력을 확인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에서 감독이 주시하는 대목은 자립적 인간으로 성장하지 못한 ‘애어른’ 부의가 공산당 지도자의 가르침으로 어떻게 재탄생하는가이다. 중년에 이르도록 제 손으로 세수조차 하지 못하고, 혼자서 옷도 입지 못하는 허수아비 인간 부의를 자주적 인간으로 변모시키는 공산관료. 하지만 유능한 관료도 모택동이 일으킨 문화대혁명의 서슬을 피하지 못한다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베르톨루치는 담담하게 그려낸다.

아마도 그런 점이 1987년 아카데미 9개 부문 수상으로 이어졌는지 모르겠다. 등소평의 ‘흑묘백묘론’에 기초한 개혁개방으로 은인자중 도광양회의 자세로 자본주의 길을 걸어온 중국의 가까운 과거를 되짚는다는 의미를 가진 영화. 무엇보다도 모택동의 개인우상화와 절대권력 확립을 위해 시작된 문화대혁명에 대한 비판적인 안목이 호소력을 얻었던 듯하다.

그러다 2003년에 베르톨루치는 68혁명을 청춘들의 육신과 욕망으로 풀어내는 ‘몽상가들’로 관객과 만난다. “상상력에게 자유를!”, “모든 억압하는 것을 억압하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던 세계사적인 대사건 68혁명. 유럽은 물론이려니와 대서양 건너 미국과 태평양 너머 일본까지 진출한 위대한 68혁명의 내재적인 의미를 청춘남녀의 육신과 사랑으로 해석하려는 60대 감독 베르톨루치의 눈물겨운 의욕과 분투가 돋보인 영화 ‘몽상가들’.

대한민국에서 베르톨루치는 유명하거나 대중적인 감독이 아니다. 그가 다룬 영화의 주제가 관객들에게는 난해하거나, 무겁거나, 낯설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러하되 지난 세기 영화판의 대가(大家) 가운데 하나가 불귀의 객이 되었음은 자못 아쉬운 일이다. 그의 영면을 기원한다.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