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준섭변호사
▲ 박준섭 변호사

대구가 낳은 천재화가 이인성은 17세 때인 1929년 제8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입선하고 스무살엔 특선하면서 화려하게 등장했다. 수십개의 공모전에 출품해 입상했다. 그 후 일본으로 유학해 고흐, 고갱 등 후기 인상파의 화풍을 감각적으로 소화했다. 1932년 요미우리 신문엔 ‘조선의 천재 이인성’이라는 기사까지 실릴 정도로 근대 대구가 낳은 천재화가였다.

많은 천재의 삶이 그렇듯 천재의 마지막은 안타까운 비극이었다. “나 말요? 나? 천하의 나를 모르오? 대한민국에서 제일가는 나를 모르오? 난 이인성이오. 천하의 천재 이인성이오”. 서울의 한 거리의 통금 시간, 길을 막아선 치안대원은 어이가 없었지만 취객의 기세가 하도 등등해 집으로 보내준다. 그러나 치안대원은 그를 뒤쫓아가 고위층 인사인 줄 알았더니 고작 화가라며 쫓아가 총을 쏜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1월 벌어진 총기 오발 사고다. 그의 나이는 38세였다. 이 이야기가 소설가 최인호가 ‘누가 천재를 죽였는가’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주는 슬프고도 어이없는 이야기다.

대구 산격동에 이인성을 기억하기 위한 공간으로 ‘이인성 사과나무거리’가 있다. 최근에는 대구시가 이인성(1912∼1950)이 살던 대구 집을 복원하기로 했다. 그가 초등학교 시절인 1920년대 6년간 살았던 대구 중구에 있는 고택(120여㎡)이다.

이인성의 집은 100여 년간 집 주인이 여러번 바뀌면서 기존 ‘L’ 형태의 집이 ‘ㄷ’ 형태로 바뀐 상태다. 대구시가 이인성 고택을 복원할 때 너무 원형의 복원만 고집하지 말고 인접공간과 지하 등을 이용해 건축디자인적으로 의미있는 공간으로 복원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옛집만 덩그러니 있지 않았으면 좋겠다.

또 최근에 이인성 고택복원과 주변에 도심재생 소식 이후 마음에 걸리는 기억이 있다. 그가 남긴 작품 약 200여 점 중에서 1960년대 초 한국미술협회 등이 연 ‘한국현대미술가유작전’에 전시된 작품 60점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화백 사망 후 설원식 전 대한방직 회장이 이 그림들을 이인성 미술관을 만들겠다며 가져갔다고 이 화백의 아들은 말했다. 정당한 매매계약으로 인한 점유인지에 의문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1960년대 초에 한국 최초의 근대미술관을 건립하자는 여론이 일자 정부는 근대미술관 건립을 위한 첫 단계 사업으로 한국현대미술가 유작전을 개최했다. 이때 대한방직은 근대미술관 건립을 위한 스폰서 기업이었지만 미술관 건립은 자금난 등을 이유로 무산됐다. 미술관 건립 논의가 무산되는 와중에 이인성의 작품 다수가 대한방직가(家)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이것이 미술계 인사들의 전언이라고 언론이 보도한 내용이다.

작품 중에는 ‘실내’(1935년 작), ‘겨울풍경’(1947년 작), ‘들국화’(1947년 작) 등이 포함돼 있고 감정가만 총 300억원이 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가운데 ‘겨울풍경’의 경우 보관상태가 좋지 않아 작품이 훼손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런 보관상태로 보면 다른 작품들도 과연 보존이 제대로 됐는지 의문이다.

이제는 이인성의 작품을 어두운 지하실 창고에서 꺼내 다시 대구시민의 품으로 되돌려받아야 한다. 이는 이인성의 유족도 바라고 있다. 실제 그의 작품이 대구에 돌아온 전례가 있다.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이 대구 명덕초등학교에서 빌린 ‘사과나무’가 바로 그것. 지역을 다니면 곳곳에 이인성을 기념하면서 작품의 사진을 걸어놓고 전시하는 곳을 볼 수 있다. 그만큼 이인성이 시민의 가슴에 깊이 새겨져 있는 작가이기 때문이겠지만 문화도시 대구를 표방하는 우리의 현실을 보여주는 민낯인 것같아 민망할 때가 많다. 이것이 과거 근대문화예술의 중심이었던 대구의 시민들이 ‘바로 지금’ 이인성 화백의 그림의 반환운동을 시작해야 하는 이유다. 그림이 반환되는 날, 우리는 죽은 이인성이 아니라 살아있는 이인성을 대구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