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
▲ 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

문학을 공부하고 가르치면서 중하게 여기는 덕목은 공감이다. 공감은 등장인물들이 처하는 대립과 갈등, 절체절명의 위기와 전락, 위대한 승리와 치명적 패배를 목도하면서 그들과 동질감을 느끼는 행위다.

“너의 마음이 나의 마음과 같다!”는 것에서 공감은 시작한다. 그것이 슬픔이든 분노든, 한탄이든 자조(自嘲)든, 증오든 사랑이든 문학의 주인공과 독자가 공유하는 감정과 인식의 교류에서 공감은 생겨나고 확산한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강의실에서 공감이 자취를 감췄다. 소설이나 희곡, 시를 읽지 않는 세대가 주축이 되어버린 염량세태의 당연한 풍경이다. 대학입시를 위한 ‘축약본’ 독서를 끝으로 대다수 청춘은 문학과 영원히 작별한다. 줄거리와 주인공, 작가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한 최소한의 독서 아닌 독서가 청춘의 영혼을 피폐시킨다. 이런 양상은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하며 드라마 결말을 궁금해 하는 대중 심리와 친연관계를 가진다. 촌각을 다투는 조급한 시대에 사건 진행과정과 인물의 복잡다난한 내면세계에 대한 천착은 사치스런 과업이 되고 만다. 카잔차키스의 ‘희랍인 조르바’가 어렵다는 대학생들이 등장한 까닭은 그래서일지 모르겠다. 30대 중반의 주인공 오그레가 60대 경험주의자 조르바에게 삶의 비의(秘意)를 깨쳐가는 과정이 다각도로 그려진 소설.

거기 덧대진 세계열강의 하수인(下手人)이자 약소국 그리스의 운명, 그리스정교의 부패상과 작가의 풍자가 뒤섞인 거대한 섞어찌개 ‘희랍인 조르바’의 난해함을 호소하는 21세기 대한청년.

복잡하지도 어렵지도 않은 현대소설의 내용마저 제대로 이해되지 않는 판국이니 ‘공감’은 언감생심이다. 등장인물의 사유와 인식, 행위가 무엇을 지향하며, 왜 그리 되었는지, 작가가 그려내려는 지향점마저 모호한데 무슨 공감이 가능하겠는가! 최소한도의 상황인식과 판단능력이 인물과 사건에 대한 공감의 기초임은 자명한 이치. 하되 상황전개와 갈등과 결말로 치달아가는 서사(敍事)가 이해되지 않는데 어떤 공감이 생겨나겠는가. 한국사회에 완전 결석한 공감과 충만한 증오를 ‘세월호 폭식사건’에서 확인한다. 유민 아빠가 생사의 갈림길에서 장기간 단식을 결행하는 광화문 한복판에서 보란 듯 자행된 ‘폭식 퍼포먼스’는 21세기 대한민국의 야만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300명도 넘는 망자(亡者)들의 아픈 영혼과 유가족의 고통을 백주대낮에 손가락질하며 비웃고 조롱하는 인간의 탈을 쓴 백정들의 광대놀음. 거기 어디서 우리가 인간임을 확인할 수 있는 미소(微小)한 징표라도 있는가?! 광대들의 일장 탈놀음은 무지와 야만성뿐 아니라, 공감능력 부재에서 기인한다. 인간을 향한 최소한도의 예의도 법도도 갖추지 못한 무지몽매의 야만성이 타자(他者)의 처절하도록 아픈 심성을 결단코 헤아리지 않고 비웃으려는 공감의 진공상태와 만난 것이다. 그들은 하마의 썩은 사체를 앞 다투어 뜯으며 주린 배를 채우려 괴성 질러대는 하이에나와 다르지 않다.

공감해야 비로소 우리는 분노할 수 있다.

사태의 진실에 가까워질수록 우리의 분노는 커진다. 그래서 수주(樹州)는 왜장(倭將)을 끌어안고 순교의 길을 떠난 논개를 추모하면서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다!”고 노래했다. 분노는 불특정 다수를 향한 증오와 악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불의와 부정을 징벌하는 정의로운 행위의 예비단계다.

우리는 시대와 공간에 최대치의 공감을 인입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른 사람의 사유와 인식, 행동을 재삼재사 숙고하고 헤아리면서 공감의 영역을 넓혀가는 것이야말로 무의미하고 폭력적인 분노가 아니라, 창조적이며 건설적인 분노를 잉태할 것이다. 그것의 출발은 우리가 고전이라 부르는 문학과 정직하고 차분하게 대면하는 일이다.